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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친칠라28023.05.07

쇤베르크의 대표작은 무엇이고 그 특징은 무엇인가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쇤베르크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하나입니다. 쇤베르크의 대표작은 무엇이고 그 특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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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쇤베르크의 주요 걸작으로는

    관악 1925중주(1926), 1927개의 풍자(1934),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1932), 오페라인 '모세와 아론', 가곡 '달의 피에로' 등이 있습니다.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는 오스트리아계 작곡가로서 무질서와 관련된 새로운 음악 작곡 방법(연속성과 12 음색 행)을 창안했습니다. 이런 쇤베르크는 표현주의 작곡가로서과다한 불협화음과 교란을 특징으로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이 작곡법은 좋게 들리지 않아야 하지만, 쇤베르크는 작품이 응집력 있고 소리의 합이 뛰어날 정도로 무질서를 마스터했다고 평가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 아놀드 쉔버그 Arnold Schoenberg, 1874년 9월 13일 ~ 1951년 7월 13일)는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이다. 음렬을 사용한 12음기법과 무조음악을 정립한 최초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쇤베르크는 빈에서 태어나서 음악을 독학으로 공부했다(레슨을 알렉산더 젬린스키에게만 받았다). 20대에 오페레타의 관현악 편곡으로 돈을 벌면서 현악 6중주 "정화된 밤"(1899년)과 같은 작품을 썼다. 후에 그 작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현재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쇤베르크의 작품 "구레의 노래"를 접했을 때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구스타프 말러는 쇤베르크를 문하생으로 두고 자신이 죽은 뒤에 그의 뒤를 봐 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했다. 쇤베르크는 말러의 영향을 받았으며, 말러를 “성자”로 여겼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작품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년에 "실내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되었을 때 청중은 적었으며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1913년에 그 곡이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렉산더 젬린스의 곡과 함께 다시 연주되었을 때 청중은 소리지르며 비난했다.

    후에 베르크의 가곡이 공연되는 동안에는 난동이 시작되어서 경찰을 불러야 할 정도였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조성 음악을 부수는 것이었으므로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의 추종자와 학생들은 그를 음악의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보았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싫어했다.

    후에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을 만들었다. 이는 후에 음렬주의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의 제자들이 그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2차 빈 음악파를 결성했다. 그들 중에는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와 한스 아이슬러가 있다.

    그는 음악 이론으로도 명성을 쌓았는데, 그의 책으로는 "화성 이론(Harmonielehre)"부터 "음악 작곡의 기초(Fundamentals of Music Composition)"까지 있다. 그의 책은 아직까지 출판되어 음악가들과 작곡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쓰이고 있다.

    1933년 쇤베르크는 나치에 의해 유럽에서 추방되어 1941년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죽었다.쇤베르크는 13 공포증이 있었다.

    그의 후기작품인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제목을 옳은 철자법인 "Moses und Aaron"으로 하지 않고 "Moses und Aron"으로 한 것은 쇤베르크 자신이 알파벳 수가 13개가 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이 13일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다.

    그는 76살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자리수 두 개를 합하면 13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77번째 생일을 보내고 두 달 후에 죽었다.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1914년)까지가 '평범한'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의 음악은 아주 달라야 한다."

    그 해에는 추상 미술과 정신 분석 요법이 등장하였다. 그당시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생각의 흐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로 들어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1년(Gurrelieder-구레의 노래. 1911년 완성)부터 1910년(Five Pieces for Orchestra)까지 쇤베르크의 음악은 누구보다도 더 급격히 바뀌었다.

    그가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7과 실내 교향곡 작품번호 9를 완성했을 때 그는 그의 작풍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사중주 작품번호 10과 세 개의 피아노 소품 작품번호 11을 작곡했을 때, 화성에 첨가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실제로 연주되었을 때 협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에 별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쇤베르크 자신이 음악을 반복하거나 발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당시의 음악은 함축적이고 생략적이었다.제1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큰 고비가 되었다. 군에 복무하면서 곡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그 시기에는 그의 미완성 작품만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음악의 질감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12음 기법을 만들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그의 친구 Josef Rufer와 산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독일 음악의 우위를 100년 동안 지속시킬 발견을 했다네."

    이 말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전을 빗대어 표현한 쇤베르크만의 조소적인 유머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모차르트와 바흐처럼 되고 싶어하는 야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쇤베르크는 많은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기법이 과거의 음악을 답습하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정점은 "모세와 아론"인데, 그는 삼분의 이 가량을 썼지만 완성하지 않았다. 결국 오페라는 모세가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소리치는 부분인데, 쇤베르크가 그 자신을 어떤 예언자로 생각하여 더이상 작품을 쓸 수 없지 않았겠냐는 설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쓴 작품에서 그는 (전통화성은 쓰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화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의 그는 자신의 음악이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현재까지도 쇤베르크의 기법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음악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이 음악에 깊게 공감하기도 한다.

    쇤베르크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프란츠 마르크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과 같이 전시되어도 좋을 정도였다고 한다. 연극과 시, 그리고 정치 문제와 유대인들에 대한 책도 썼다.

    주요 작품

    교향곡 ; '정화된 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구레의 노래', '5개의 피아노곡 op. 23', '바르샤바의 생존자',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 31', '바이올린 협주곡 op. 36', '실내 교향곡 1번 op. 9', '달의 피에로',
    '5개의 관현악곡 op. 16',
    극음악 ; '기대'
    가곡 ; '달의 피에로'
    오페라 ; '모세와 아론'



    작품설명 "달의 피에로"

    쇤베르크(1874~1951)가 1912년에 작곡한 무조기법에 의한 대표작이라고 한다. 벨기에의 시인 A. 지로(1860~1929)의 시를 바탕으로 했고, 전3부 각 7곡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성악·피아노·플루트·클라리넷·바이올린·첼로 앙상블을 위한 작품이다.

    악기의 편성이 각 곡마다 변화한다.그리고 달의 피에로는 달에 홀린 피에로가 교수대 위에서 목이 잘리는 꿈을 꾼다는 기이한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쇤베르크는 무조기법과 이야기와 노래 중간에 슈프레히슈티메(레시터티브의 독일어)를 사용했다

    시대적인 배경과 활동

    나는 혁명적이 되기를 강요당한 보수주의자이다.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중 한사람이며 역사에 대하여 예리한 감각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인 쇤베르크는 자신을 항상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독일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전통의 정통적 계승자이며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한 쇤베르크에게 한상관이 그에게 정말로 그다지도 불협화음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을 만드는 아르놀트 쇤베르크라는 작곡가냐고 물었을때 그는 실로 그답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도 그런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의식적으로 부과한 역사적 사명이란 음조체계가 고갈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런 체계에는 종지부를 찍고 대신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혁명은 달리 적당한 말이 없어 자유스러운 무조주의(1908년부터)와 음열적 12음음악(공식적으로는 1923년부터)이라 불리는 두 단계를 거치게 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진정한 혁명들이 그러했듯이 그가 일으킨 혁명도 과거를 견고히 하는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중산계층의 가정에서 태어난 쇤베르크는 8세 때부터 작곡과 바이올린의 연주를 시작했다. 그 후에 실내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악기를 첼로로 바꾸었고 또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독학으로 음악가로서의 소양을 쌓았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스승은 후에 매형이 되는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였다.

    처음에 그는 바그너와 브람스에 열중했는데, 그것은 당시로서는 모순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는 바그너적인 확대된 반음계법에서 출발했으나 그의 말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것은 브람스적인 형식관이었다.

    젊었을 때 쇤베르크는 수많은 작품을 작곡했지만 출판되지는 않았다. 1897년에는 드보르작풍의 현악4중주곡 D장조를 작곡했으며 1898년부터 1900년 사이에는 몇 곡의 가곡을 작곡했고, 그 가운데 12곡이 후에 op. 1부터 op. 3으로 출판되었는데 1898년에 이 가운데 한 곡이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부터 스캔들은 계속되고 있다(훨씬 뒤에 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1899년 9월에 쇤베르크는 3주일 걸려서 리하르트 데멜 Richard Dehmel의 시에 기초한 현악6중주곡 정야(淨夜)를 작곡했으며 이 곡은 1902년 빈에서의 초연 때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곧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이 작품의 2개의 현악오케스트라판(1917년과 1943년)을 만들게 된다. 이 작품은 아직 음조를 사용했고 후기 낭만주의적 스타일로 작곡한 최초의 대규모적 작품이다. 왜 지금은 정야때처럼 작곡을 하지 않냐고 나에게 물어보면 나는 대개 나는 전과 똑같이 작곡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1927년의 쇤베르크의 말).

    정야는 분명히 바그너의 직접적인 영향을 짙게 보여주었으나 폭넓은 도약음을 사용했고 협화음에 거의 의하지 않는 선율법은 매우 독특하다. 쇤베르크의 결정적인 혁신은 만일 그가 정야에서 교향시의 장려함에 등을 돌리고 브람스의 4중주곡의 엄격한 서법을 본뜨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불가능했을 것이다(아도르노).

    에피소드

    쇤베르크만큼 정신적으로 자극을 주는 작곡가는 많지 않다. 그의 음악은 물론 그의 수많은 저서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견고한 이론이나 예리한 심리, 그리고 약간은 빈정거리는 유머 등 어느 하나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평생동안 역설을 연구하기를 즐겨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소수의 권리를 믿는다라는 것이 그의 신앙고백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가치와 전위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한 번은 어떤 음악제에서 연주가들과 함께 하는 그의 리허설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다음 작곡가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러 온 사람에게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곳에 나 이외에 다른 작곡가가 있습니까?. 또 1948년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정치에 대해 큰 실망을 표명한 후에 우리들 음악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세계에서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전혀 비정치적입니다.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썼다.

    그런데 그런 그가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있던 1932년부터 1933년경 아도르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지금은 예술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느닷없이 선언했다. 그리고 이미 1932년부터 개인적인 사정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특이한 그의 직관에 의해서, 칸딘스키에게 쓴 열렬한 편지를 통해서 히틀러에 대한 예언적 사실을 말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쇤베르크(Arnold Schoenberg)는 표현주의와 무조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조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반음계의 12음들을 동등한 가치로 조직적인 음정 구성 원리를 찾는 12음 기법의 창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