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주역 김홍집은 죽음이 어떠했나요
갑신 정변을 일으켜 3일 천하를 이룬후 실패 후 일본어로 도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년과 죽음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고 친러 내각이 수립됩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오자마자 을미사적과 법부대신 장박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처형, 친러 정권들은 즉각적으로 의병과 보부상 수천명을 동원했고 경복궁에 경관들을 배치했는데 일본 군인들은 총검을 날카롭게 세우며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을 호위합니다.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이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김홍집은 고종을 직접 배알하여 회심을 촉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습니다. 지금 나섰다가는 죽을 것을 만류하는 일본군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뿌리칩니다.
'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대신으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오!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
이후 직접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일개 순사에게 붙잡혀 정병하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끌려 간 다음 고종이 동원한 지방에서 올라온 보부상들에게 돌을 맞고 집단 구타를 당한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이에 끝내지 않고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시체를 끌고가면서 광화문~종로 거리를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김홍집의 가족 또한 연좌제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 김홍집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80년에는 통상 조약 등의 문제점을 해결하라는 명을 받고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비록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는 실패하였으나, 황준센이 쓴 <조선책략>과 정관응의 <이언>을 가지고 돌아왔다. 1882년 3월과 5월 미국ㆍ영국ㆍ독일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전권대신들의 부사로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톈진에 파견되어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흥선 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고, 북양대신 이홍장의 막료를 상대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의정ㆍ조인하는 등 대외교섭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에 참가하지 않고, 정변이 실패한 뒤 좌의정 겸 외무독판으로 뒷수습을 담당하며 1885년 일본과 한성조약 체결 실무를 맡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맡아 수습에 나섰다.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관으로 1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내무대신 박영효와 연립내각을 수립, ‘홍범14조’를 발표하고 제2차 개혁을 주도했다. 1895년 역모사건으로 박영효가 일본에 망명하자 친미파ㆍ친러파 등과 함께 내각을 구성하고 제3차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당시 내각은 우리나라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단발령 시행과 명성왕후 시해 사건 처리 미숙으로 인해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발표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고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과 개방을 단행한 친일파로 몰려 성난 백성들에 의해 광화문 앞에서 타살되었다.
아관파천 직후 “한 나라의 총리로 동족의 손에 죽는 것도 천명이다. 남의 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피신하지 않았다. 근대 역사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의 뒤처리를 맡아 수습한 실무형 관료의 전형이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홍집은 온건개화파에 속했던 인물로 갑신정변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김홍집의 최후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종을 직접 배알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던 김홍집은 일개 순사에게 붙잡혀 정병하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끌려간 다음 고종이 동원한 지방에서 올라온 보부상들에게 돌을 맞고 집단 구타당한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에 끝내지 않고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시체를 끌고 가면서 그야말로 광화문~종로 거리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렸다.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연좌제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한 김홍집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홍집은 1842년(헌종 8년) 태어나 1896년(건양 1년, 고종 33년) 양력 2월 11일에 죽음을 맞이한 온건 개화파이며 갑오개혁 추진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 총리 대신입니다. 사위가 이항복의 후손이며 독립 운동가이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영향력이 강했으나 김홍집은 이 기회를 살려 조선을 완전히 탈바꿈시키고자 일본이 놀랄 정도로 강력하고 의욕적인 개혁을 시행했으며, 이 갑오개혁은 훗날 조국 근대화의 발판이 됩니다. 김홍집은 명성왕후가 일본인에게 살해 당하고 고종의 아관 파천 당시 거리로 나가서 성난 군중들에게 의해서 무참히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한때는 친일파라고 오명을 쓰기도 했으나 사실은 친일파는 아니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라고 역사는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