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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7

효종이 추진했던 북벌론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병자호란때의 치욕을 갚아주고자 청나라를 치려고했던 효종이 추진했던 북벌론. 이 북벌론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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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5.07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론의 열기는 하루아침에 가라앉고 말았다. 사실 신하들 대부분은 드러내놓고 북벌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반청 분위기와는 달리 내심으로는 승리를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두 차례 전쟁을 치른 뒤의 그 엄청난 피해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더욱이 효종이 죽고 난 뒤 복상(服喪) 예송 문제로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예송(禮訟)을 벌이다가 끝내 청나라 정벌을 주도하던 서인이 정권에서 밀려나자 북벌론은 아예 골방으로 밀려났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격히 변화하였습니다. 중원은 한족이 지배하는 명나라에서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나라로 교체되었고, 일본은 오랜 전국 시대를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의 일원적인 통치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 사이 한반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장이 되어, 조선 정부는 전쟁 이후 피폐해진 백성의 생활과 실추된 국가 체제를 정비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특히 병자호란은 오랑캐인 청나라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로 조선 지식인의 정신적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로 항복한 조선은 청나라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습니다. 소현세자가 심양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뒤이어 봉림대군이 즉위했습니다.


    1649년(효종 즉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강남 지역에는 남명 정권이 존속하고 있었고, 청나라는 아직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지 못하였습니다.


    효종은 반청척화파(反淸斥和派)를 요직에 배치하여 어영청⋅수어청⋅훈련도감의 군사력을 강화하였고, 대동법 실시를 확대하는 등 경제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효종은 복수설치⋅춘추의리 등을 강조하는 송시열을 등용하여 북벌의 추진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은 직접적인 정벌이 아니라 정사를 바르게 함으로써 오랑캐에 대응하자는 논리를 폄으로써 북벌 정책은 실제로는 전란 이후 무너진 국가의 재정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북벌 운동을 통해 효종은 부왕 인조가 잃어버린 국왕의 위엄을 되찾고자 하였으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산림들은 출사의 명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의 죽음과 1남명 정권이 붕괴하면서 북벌 운동은 실질적인 동력을 잃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이 북벌정책에 실패한 이유는

    첫째, 기득권층인 조선 사대부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없었다 라는 점 입니다.

    둘째,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면 우려 때문 입니다.

    셋째, 청나라가 전성기로 상대적으로 조선의 국력이든 한계가 있었다 라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