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은 역사에 영향을 끼친 조선의 연은분리법이 조선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나요?
연산군 시기에 개발된 조선의 연은분리법은 일본에 전해져 세계 은 역사에 크게 영향을 끼쳤는데 조선에서는 자체 개발한 연은분리법이 어떻게 어느곳에서 적용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은분리법 또는 단천연은법은 16세기 초 연산군 시기에 조선에서 발명된 은광석에서 순수 은을 추출하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조선에서 만들어졌지만 본국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의 은 생산량을 크게 높여 대항해시대 서양인들의 탐험을 촉진시키고, 일본이 서양과 잦은 교류를 하게 되는 등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술입니다.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은광석 안에는 납과 은이 섞여 있는데, 둘은 서로 다른 물질이기 때문에 녹는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따라서 납이 먼저 녹아 산화되어 은광석으로부터 분리되고, 순수한 은만 남아 은을 추출하는 원리입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에서 들어 온 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와서야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1503년(연산군 9) 조선에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개발되어 일본으로 전파된 뒤, 일본 내부의 은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일본이 세계적인 은 생산, 수출국으로 성장하면서 1530년대부터 조선으로도 일본 은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일본 은의 유입은 잠시 주춤했으나, 1609년(광해군 1) 조선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로 재개되었다. 호란과 명·청 교체, 동아시아 무역 환경 변화, 일본 내부의 은 수출 억제 등으로 부침은 있었으나 일본 은은 18세기 중엽까지 지속적으로 조선에 유입되었다.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국내에서 생산된 은으로 내부 수요를 충당하였으며, 그 이상의 생산은 중국으로의 유출을 우려하여 억제하였다. 연은분리법의 개발로 국내 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정부의 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 은의 대중국·일본 유출이 늘어났다. 연은분리법은 일본으로도 전파되어 일본 내부의 은광 개발과 생산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은을 생산하여 해외로 수출하였으며, 그 대부분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일본 은은 나가사키[長崎]와 쓰시마[對馬島]를 통해 수출되었는데, 조선으로 들어와 중국으로 흘러 간 은은 쓰시마를 경유하고 있었다. 일본 은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530년대부터이나, 그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양란과 명말 청초의 혼란을 거쳐 조선과 일본,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잠시 주춤했던 일본 은이 다시 조선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사무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 온 일본 은에 관한 기록은 1684~1752년분이 남아 있다. 이 시기 많게는 한 해 27만 냥 이상의 일본 은이 조선으로 유입되어 대중국 외교와 무역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동아시아 은 교역 체제는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중국의 동남부로 이어지는 길과 쓰시마에서 조선을 거쳐 중국의 북동부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다. 조선이 개입된 은 교역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정점을 이루고 18세기 전반까지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일본 은의 생산과 수출이 감소하면서 조선으로의 유입량도 줄어들었다. 1730년대는 그 양이 매년 10만 냥, 1740년대는 매년 5만 냥 이하로 떨어졌고, 1752년(영조 28) 1천 냥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기록에서 사라졌다.
일본 은의 유입 감소와 함께 그 품질도 일시적으로 떨어졌다. 1697년(숙종 23) 순도 80%인 기존의 경장은(慶長銀) 대신 63%인 원록은(元錄銀)이 새롭게 주조되어 1699년부터 조선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조선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일본 내에서는 품질이 낮은 저순도의 은을 사용하되, 1712년(숙종 38)부터 조선에는 순도 80%의 특주은(特鑄銀)이 보급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후 일본 내에서 유통되는 은의 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80%의 은이 사용되었으나, 유입량의 감소는 지속되었다.
일본 은의 유입이 감소, 단절되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조선에서는 대중국 외교와 무역 자금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은 국내 은광을 개발하고 주력 수출품을 홍삼으로 대체해 나갔다.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은광의 개발과 생산을 억제하였으나, 16세기 이후 일본 은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조선은 일본 은을 대중국 외교와 무역 자금으로 적극 활용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 은 교역 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또한 국내에서도 고액 거래를 중심으로 은의 유통이 증가하였으나, 18세기 들어 점차 일본 은의 유입이 감소하면서 국내 생산과 대외 무역 구조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교역, 조선 내부의 유통과 소비라는 관점에서 은의 역할을 재조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은분리법과 관련된 최초 기록은 연산군일기에 수록되어있는데 1503년 6월 13일 조에 김감불과 김검동이라는 사람이 개발해 시연했다고 알려져있고 연철을 화로에 녹여 은을 골라내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백성이 임금 앞에서 기예를 시연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생에 한번 있기도 힘들었으나 정사인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볼때 연은분리법이 조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기술이었음이 시사됩니다.
연은분리법 시연을 본 연산군은 이제 은을 넉넉히 쓸수있다며 흡족해하고 닷새 뒤 조선 최대의 은광이 있는 함경도 단천에서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캐도록 지시, 또 공조판서 정미수가 민간에 채굴을 허용하는 대신 세금을 내게하는 채은납세제와 행장을 발급하라 건의, 연산군은 이를 시행했고 당시 납부 금액은 채굴하는 한 사람당 1일에 은 1냥이었습니다.
연은분리법은 이전에 중국에서 사용하던 회취법보다 더 효율적이었으며 더 많은 은을 산출할수있었고, 명나라의 실용서 천공개물 등에 소개되며 널리 퍼졌습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가고 중종이 즉위한 1506년 중종은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우며 은광 채굴을 금지, 1507년 4월 연은분리법도 금지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는 왕의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몇몇 대신들은 재정 부양을 위해 민간에 은 채굴을 다시 허용하자고 요청해 민간에 은광 채굴이 일시 허용됩니다.
1508년 단천에서 은이 많이 나는데 이걸 군민들이 무단으로 캐서 통사에게 팔고 통사가 이 은을 가지고 북경에 가지고 가는 일이 있다며 즉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고있으니 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며, 중종은 이를 단속할 강직한 사람을 보내 관리 감독하게 하고 단천의 은은 1년간 나라에서 사용할 분량만큼만 캐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합니다.
단천에서 나는 품질 좋은 은 때문에 여러 폐단이 나타나는데 은을 캐기 위해 깊게 파고 들어가다 구멍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압사, 단천 현지에서는 납을 은으로 잘 정제해 보냈는데 이것이 덩어리의 형태로 가공될 때 일부 장인들이 그 안에 다른 것을 넣고 은을 겉에 씌워 유통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에 무게를 따지는 것이니 덩어리로 만들지 말고 납작한 형태로 만들게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으며 은이 단천에서만 나는 것은 아닌데 단천에서만 채굴하다보니 폐단이 크고 그곳의 백성들만 고통받고 있으니 다른 곳에서도 채굴 시험을 해보라 명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은광 개발을 하던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전래된 유래에는 2가지 기록으로, 중종실록 종4품 판관으로 있던 유서종이라는 사람이 일본인을 끌어들여 연은분리법을 유출했다는 내용으로 유서종이 실록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입니다.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은 유서종 일가가 모반에 관여된 일이 있으므로 조관에 임명하기 합당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조정에서 이 유서종이라는 사람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이 드러나며 , 이어 2년 뒤 유서종이 왜인과 접선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사헌부가 유서종의 죄에 관한 첩보를 입수해 왕에게 고한 내용입니다.
유서종이라는 관리는 가덕도에서 허가받지 않은 수렵으로 동래 현령에게 걸린 전과가 있으며, 서울에서 내려 온 큰손을 접대한 적도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일본 사람을 위장전입시켜 거짓된 공을 쌓고자 했으니 중죄가 아닐수 없다 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연은분리법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수 없는 고급기술이므로 이를 일본에 유출한 점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단천의 은도 거의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이미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많아 결국 단천의 은은 채굴하지 말라는 명이 내려집니다.
두번째는 일본의 긴잔큐키에 나오는 기록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연은분리법을 시도했다는 이와미 은광에 전해지는 역사를 보면 1562년 하카타 출신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가 은광을 발견했으며 조선에서 경수와 종단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해 이들로부터 연은분리법에 관한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서술합니다.
은광석에 납이 다량으로 섞여 있던 이와미 은광에서 이 연은분리법 전래는 일본의 은 생산을 대량으로 증가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