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청에 쉽게 숙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명에 대한 재조지은을 강조하던 이들이 이후에도 말로는 재조지은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명에 대한 의리를 버리고 청에게 숙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명에서 한동안 책봉해주지않은데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선 쉽게 숙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름 남한산성까지 가서도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버티고 또 싸워보려고 했았습니다. 다만 결국 삼전도에서 청과의 군신관계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물리적으로 청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계속 명과의 의리를 지키려고 버티고 있다가는 청에게 복수는 커녕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이 청과 군신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국에는 힘의 논리에 굴복한 것입니다. 청나라에게 호의적인 관료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으로 거의 멸망직전의 조선을 구해준데에 따른 의미로 재조지은을 주장하며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했지만 후금의 군대는 너무도 강했고 단숨에 강화도까지 처들어와 왕비를 비롯한 왕실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항복을 요구하자 인조는 삼배구고두례의 삼전도굴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후금(청)의 군사력이 너무 막강했다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는 쉽게 굴복 한것이 아니라 최대한 항복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1637년 2월24일 (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으로 들어가 항전하지만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조약을 맺는데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왕이 머리를 땅에 찢고 충성을 맹세하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