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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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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장군의 성장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후삼국시대에서 태조 왕건과 함께 하였던 신숭겸 장군에 관한 것인데요.

신숭겸 장군의 일대기,성장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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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능산(申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숭겸 [申崇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숭겸은 고려전기 고려개국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927년(태조 10)에 사망했다. 궁예 말년에 홍유·배현경·복지겸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에 봉해졌다. 927년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일삼자, 분개한 태조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 조문하고 동시에 친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에서 견훤을 맞아 싸웠다. 이 싸움에서 태조가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을 때, 신숭겸은 대장으로서 원보·김락과 함께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숭겸의 활솜씨가 뛰어났는지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간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화살을 쏴서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데 이 이야기가 평산 신씨의 본관이 평산이 되는 유래이다.


    신숭겸 이전에는 성씨가 없었고 출신은 미천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라 중앙의 왕족, 귀족층이나 장보고처럼 중국물 먹은 사람이 아니면 지방 명문가 출신들도 성씨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비록 후백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찬이었던 능환조차 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3] 그 외에도 정2품 대광이었던 만세나 매곡성주 공직 등 고위층이나 유력가이면서도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 사례는 많다. 고려사 태조 시기를 살펴보면 성씨가 없는 관료나 호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동일 시기에 성씨가 전해지는 박지윤, 유천궁 같은 유력 호족들 역시 당대에 자칭하고 세보를 꾸몄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수많은 성씨들의 시조가 후삼국시대 호족이다.


    고려 개국에 기여한 무장들 중에서는 일찍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던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참패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한고제 유방을 살리기 위해 미끼가 되어 죽은 기신을 본따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했으며, 왕건은 일반 군졸의 옷을 입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왕건인줄 알고 쫓았고 결국 신숭겸은 전사했으며 함께 유인 작전에 나선 김락, 김철, 전이갑·전의갑 형제와 그 사촌동생인 전락, 개국공신 평장사 호원보, 대상 손행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 이 때 4명을 포함하여 모두 8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하여 공산의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 한다.


    훗날 참수된 신숭겸의 시신은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겨우 찾았지만 머리는 끝내 찾지 못해서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고, 미리 정해둔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에 매장해주었다. 신숭겸의 무덤은 봉분이 3개인데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지키고자 이렇게 했다고 전한다. 이 묘자리는 풍수지리가들이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가보면 석물 같은 게 없을 뿐이지 영락없는 왕릉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맑은 날씨에 묘로 올라가보면 춘천시내가 훤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