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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06.02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징병제가 있었나요?

앙리 우리나라 징병제 역사가 궁금한데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한 이후부터 정식 군인이 조직 된 것인가요? 그렇다면 남북 전쟁 전에 징병 제도가 있었나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2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으나 전쟁사는 인류사와 맥을 같이 하므로 씨족이나 부족이 전쟁하는데 있어서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부터 인적자원을 총동원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중동에서는 Ilkum이라고 해서 함무라비가 다스리던 때도 있었고 동아시아에는 중국의 전국시대 이전부터 있던 유서깊은 제도이다. 하지만 전 근대의 징병제는 대부분 '전쟁 때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긴급 소집'의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최소 수만단위의 병력을 운용하던 동아시아 쪽은 징병이 없으면 전쟁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대에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간에 징병되는 병사가 직접 무장을 챙기거나 해야 하였기에 상비군을 징병제로 유지하는 지금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 고대 서양의 경우, 전쟁 시 군대가 소집되어 의무를 마치면 땅 등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런 건 고대 로마에서나 가능했던 것이고, 중세 이후부터는 둔전제나 농민을 전시에 군인으로 부리는 부병제로 전이되었다. 고대 동양의 경우 최소 기원전 770년 전인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정권이 설립된 각 국가들간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상호 간에 숫자로 밀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위해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한국의 경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징병제(=양인개병제, 농병일치제)를 시행하였다. 반도라는 지리환경으로 인해 전선이 2중, 심하면 3중으로 형성되기 쉬웠기 때문에 국경을 방어하고, 전선에서 싸울 병력이 많이 필요했다. 여기서 전선의 2중화 즉 양각이란 북방에 한족, 여진족 등이 있고 남방에는 왜(일본)가 있었다. 지킬 국경이 두개나 되기에 병력도 둘로 나뉜다. 영토의 70% 이상이 산지임에도 북방의 기병 전력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는 아니더라도 기병 양성에 꾸준히 힘쓰며 조총이 도입되기전에는 활과 쇠뇌가, 조총 도입이후에는 조총이 보병의 주력 무기로 자리잡았다.

    특히 조선시대 전시에는 의병이 많이 활동했기에 그 전통을 이어 의병이 현재의 예비군, 조선군이 현재의 현역군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상비군으로 국경을 막는 것 외에 국방을 위한 정기적인 소집[2]의 형태로 군역을 가졌는데 민간인을 징집해서 병사로 써먹는단 면에서 징병제와 유사하며 수군의 경우는 아예 군역을 지워서 충원했다.

    인공비료로 농업 생산량이 폭증하기 전에는 중상주의 도시국가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식량문제 때문에 농업이 국가 최대의 업무였는데, 농부들을 징집해 전쟁터로 보낼 경우 농사 지을 인력이 모자라게 되고 농부들이 파산에 이르는 까닭에 농사철은 전쟁기간에서 기피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유 중 하나로도 거론된다. 또 전쟁이 길어지면 흉작이 나거나 국가 재정과 치안이 거덜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고 징집되는 병력의 질적하향과 전투력감소가 일어났기에 징병은 최소한으로 자제하거나 자원병 제도로 변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3] 삼국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전쟁이 없는 시기에 병사들이 농사를 짓고 군량미를 확보하다가 군량미가 충분히 쌓이고, 농사가 마무리되면 슬슬 전투 준비를 하는 것. 그러나 대규모 병력동원이 가능한 시기가 농번기 직후나 겨울로 제한되어 버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는 로마 때부터 군제개혁을 통한 자원병 제도로 상비군을 운용하거나 농사와 관련없는 직업군인인 용병들이 각광 받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징병제는 근대국가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지방 단위로 뿔뿔히 흩어진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을 대규모로 징집해, 군인으로 양성하는 과정에서 확고한 국가관을 형성시켜 국가 전체의 정체성을 공고히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징병제를 통한 "사회적 단합"에는 한계가 있는데, 징병제를 통한 사회화가 획일성, 동질성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뒤집어 말하면 다름과 차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특징을 가진다. 결국 징병제를 통한 사회적 단합은 "저 사람이 설령 나와 다를지라도 차별할 이유가 없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나와 같기 때문에 차별할 이유가 없다, 만약 다르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에 해당한다.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모두가 군복무에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징병제 제도 하에서는 복무부적격 판정을 받고 징병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징병을 통해 획일성, 동질성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이들을 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징병을 경험한 이들이 사회에 나와 이런 저런 이유로 징병에서 제외된 동료 시민들을 비국민 내지는 2등 시민으로 여겨 경멸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 현상이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로 20세기 서방세계에서 징병제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심하게 겪은 후, 많은 서방 국가들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

    한편 세계적으로 징병제는 오히려 권리의 확대를 가져 왔다. 이것은 국가주의의 확산과 국민국가 성립에 중요한 요소인데, 대부분의 국가들은 징병을 시행함으로서 민주주의의 바깥에 있던 노동자, 청년 등 피지배계층에게 어쩔 수 없이 참정권 확대나 의회 구성 등 보다 나은 조건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앤서니 기든스는 "지배의 변증법"(dialectics of control)이라 부르는데, 지속적인 자원 동원을 위해서 자원 제공자의 최소한의 동의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권력의 일정한 양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소위 말하는 의회 민주주의의 확대를 가져왔고, 2차 세계대전은 전체주의와 압제로부터의 해방 및 식민지 해방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시민권이란 전쟁 동원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 그리고 국가와의 협상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것이 제도화되면서 '권리'와 '의무'의 평화로운 교환처럼 포장되었지만, 그 바탕에는 시민들을 군대에 끌고가려는 국가의 탄압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치열한 저항이 깔려있던 것이다[4].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과정 없이 징병제가 도입되어 버리는 바람에[5], 징병제를 단순히 교육제도같은 것처럼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6]이 강하다.

    근대화 이후 국민개병제를 도입한 일본군도 징병제가 가지는 근대 사상적인 측면에 주목해 서남전쟁 당시 농민 출신의 징집군이 사족 출신의 군인들에게 당시 일본의 특수한 전장환경으로 빈발하게 발생하던 근접전에서 크게 밀렸는데도 징병제를 유지하며 타개책을 찾으려 했지 국민개병제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징병제를 근대화라는 큰 틀에서의 요소로 바라 본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 징병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