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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7.22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의군부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암울한 역사 중의 하나가 바로 일제강점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수탈과 가혹행위에 맞서 싸운 것이 독립운동인데요~

많은 독립운동기구들 중에 독립의군부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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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의 지휘 아래 의병활동을 하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던 임병찬이 귀양에서 돌아와 고종의 밀명을 받아 저라남도에서 조직한 비밀 단체입니다. 먼저 호남지방의 의병과 유생을 모아 의군부를 조직하였고,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서울에 보내 이인순(李寅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 등과 함께 이 조직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13년 2월 고종으로부터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임병찬은 중앙원수부(中央元帥府)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강화·개성·수원·광주에 5영(營)을 두었고, 각 도·부·군단위의 조직을 완성하고 그 대표를 선정하였습니다.

    독립의군부의 활동 목표는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내 한국 강점의 부당함을 알리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14년 5월 국권반환 요구서를 전국의 조직을 통해 일제히 발송하고, 360여 곳에서 조선총독부로 동시에 국권 반환과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는 전화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달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붙잡혀 조직이 발각되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임병찬은 붙잡힌 뒤 총독과 일본정부 총리대신과의 직접면담을 요구하며 항쟁하다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며 몇 차례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916년 끝내 병으로 순국하였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립의군부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한 단체입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일제강점기 1912년에 임병찬이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만든 비밀결사단체 조직입니다.

    이 단체는 대한제국 때의 왕정 복벽주의를 추구하였으며,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벌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은 한때 조선총독부관리에게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통고하고 '국권반환요구서'를 수차례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의군부는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면서 임병찬을 비롯한 지도부가 구속되는 사태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독립의군부는 비밀 결사의 형태를 띠었지만, 지도부나 활동 방향 등을 보면 전형적인 의병운동에 해당합니다.

    즉, 독립의군부는 의병운동의 장점과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제국 때의 왕정 복벽주의를 추구,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벌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은 한때 조선총독부관리에게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통고하고 국권반환요구서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립의군부는 나라를 되찾고 군주정을 회복하려는 사상인 복벽주의를 주장했던 단체입니다. 복벽주의는 대한제국의 시절을 다시 회복하자는 이념입니다. 나라를 되찾고 군주정을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동북 만주 각지에 산재해 있다가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청봉(金淸鳳)·김현규(金鉉圭) 등이 주동이 되어 그해 4월 조직하였다.

    그리고 1년 2개월 만에 6개 대대로 증강, 1919년 7월 항일투쟁과 반동세력의 분쇄를 위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동맹해 효과적인 작전을 개시하였다. 1920년 6월 국경수비대와 헌병을 격퇴시키고 한국인 순사 및 헌병보·밀정들을 위압해 간도 용정 국자가(間島龍井局子街)와 두만강 대안 각지의 친일배들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군경의 공격과 동북군벌(東北軍閥)의 내습으로 크게 제약을 받아 주로 야간공작에 치중하였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2년 전라도 지방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 1906년 최익현(崔益鉉)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됐던 임병찬(林炳瓚)이 1912년 귀양에서 돌아온 뒤 고종(高宗)황제의 밀명을 받아 조직했다. 그는 전라남도순무대장(全羅南道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동지 규합에 나섰으며, 호남 지방의 의병장과 유생들이 적극 호응했다. 이어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서울에 보내 이인순(李寅淳), 곽한일(郭漢一), 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해 서울 경기도 강원도 등 전국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1913년 2월 고종에게서 다시 전라남북도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임병찬은 중앙원수부(中央 元帥府) 아래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 강화 개성 수원 광주에 5영(營)을 설치하는 한편, 각 도ㆍ부ㆍ군 단위 조직을 완성하고 그 대표를 임명했다.

    독립의군부는 대한제국 왕정을 복고하고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준비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1914년 5월 일본의 내각총리 대신과 조선총독부 관리 등에게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는 ‘국권반환요구서’를 발송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항의 전화를 하기로 했으나, 같은 달 23일 단원 김창식(金昌植)이 체포돼 조직이 발각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임병찬은 일본 경찰에 붙잡힌 뒤 일본정부 총리대신과 조선총독과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며 항쟁하다 거문도로 유배됐으며, 몇 차례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916년 병으로 순국했다. 독립의군부는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이었지만, 지도부 구성이나 활동방향이 전형적인 의병운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 네이버 기관단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