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그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이왕 때에 중국의 제도를 본떠 대신으로 육좌평을 두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 시대에 이미 그 영향이 부분적으로나마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고려에 들어오면 예종 때에 칠재(七齋)의 하나인 구인재(求仁齋)에서 『시경』 · 『서경』 · 『역경』 · 『예기』 · 『춘추』와 함께 『주례』를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고려 중기에는 이미 『주례』가 주요 유교 경전의 하나로서 국가의 공식 교육 기관에서 교육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본격적으로 연구, 인용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의 유입으로 인해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유교 중심의 정치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된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입니다. 특히 권근 · 정도전 등의 저술에는 『주례』의 구절이 직접 인용되고 있어 이들의 『주례』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세종 때에 16책의 단행본으로 간행, 일반에 보급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조의 학자들은 경학(經學)보다 성리학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주례』와 같은 선진 경전(先秦經典)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드물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 일변도의 풍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려는 경향이 일어나면서 몇몇 학자를 중심으로 『주례』 등의 선진 경전에 대한 활발한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가운데 허목과 윤휴는 각기 『주례』에 관한 저술을 남겼고, 정약용은 『춘추고징(春秋考徵)』에서 『주례』를 중심으로 다른 경전의 재해석 · 재구성을 시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