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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 였나요

조선시대는 천주교를 박해하였는데요 다산 정약용도 말년에는 귀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가 유배당한 이유는 무엇이며 한 이유는 그도 천주교 신자였는지도 궁금합니다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장기에 유배되었고, 그 뒤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약용은 천주교였고 세례명은 사도 요한 입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901년 3월 신유박해 때 두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습니다.

      노론에서는 정씨 형제들을 제거하려했으나 셋째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고 이후 정약용의 큰 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었습니다.

      황사영 백서사건은 1801년 황사영 알렉시오가 천주교 박해를 막기 위해 외세의 군대를 끌어들여 역적행위를 하려다 발각된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약용은 신해평안사건으로 유배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인이랑 같이 학회도 열고 했지만, 나중에 천주교가 박해당하고 정부가 공식적으로 싫어하니까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의 학문으로서 인정하고 연구 및 탐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약용은 23세에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西學)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이후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는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지만,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천주교 문제가 터지기 전,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관직은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 등으로 승승장구하였다.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은 정조였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환란이 없었지만,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정약용도 정조 사후에 완벽히 정계에서 배제되고 잊혀져 갔다.


      사실 정약용은 관직에 나간 지 2년 만에 당색(黨色)으로 비판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가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출처 : 인물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