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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침공 30만 대군은 객관적으로 근거가 충분한가요

중국은 여러 차례 우리민족을 침입해 왔는데요 그러면은 엄청난 수의 군사를 대동하고 침략을 하는데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 다시 3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는데 믿기가 좀 힘듭니다 객관적으로 충분한 증거가 존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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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개의 답변이 있어요!
    • 풍족한듀공209
      풍족한듀공209
      598년 고구려의 선제공격에 분노한 수 문제는 넷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과 강남의 진陳나라 평정에 공을 세운 왕세적王世積에게 육군과 수군 30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양태왕 9년에 벌어진 제1차 고수高隋대전, 임유관臨楡關대첩입니다.

      기세 좋게 출병한 수나라 30만 대군은 죽은 자가 10명 중에 8~9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처절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전쟁의 경과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패배 이유를 육군은 장마를 만나 군량의 수송이 끊어지고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며, 수군은 폭풍을 만나 병선兵船을 많이 잃어버려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양태왕은 수의 침략을 두려워해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는 표문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수나라의 처참한 패전을 감추기 위한 왜곡 날조의 기록입니다.

      제1차 고수대전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고구려 영양태왕의 작전에 말려들어 수나라 30만 대군은 전멸하였습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때의 전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견이 또다시 양량, 왕세적 등 30만 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요택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周羅緱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登州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後陣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요서를 공략하던 앞선 말갈의 군사들이 요서총관 위충과 접전을 벌이다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임유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임유관 일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수 문제는 양양과 왕세적에게 30만 대군을 보내 그들을 뒤쫓게 하는데 여기에 수군총관 주라구의 군대까지 따라붙게 하였습니다.

      주라구는 일부러 거짓말을 퍼뜨려 군대를 평양으로 몰아가는 척 수를 쓰다가 양양의 군대에 보급품을 대 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강이식 도원수의 군대는 바로 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주라구의 군대를 격파시켰습니다. 주라구의 군대를 무너뜨린 뒤 강이식 장군은 성책을 굳건히 지키되, 별도의 영이 내려질 때까지는 절대로 나아가 싸우지 말게 하였습니다.

      양양이 거느린 수나라의 주력 군대를 상대하기 위한 다음 작전은 ‘싸우지 않고 힘 빼기’였습니다. 고구려군은 성城안 깊숙이 진을 치고 들어앉아 수비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아마도 이때 조의선인들이 후방에서 교란과 함께 수군의 보급로를 끊는 활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양이 이끄는 수나라 대군은 요하 하류인 요택遼澤에서 포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요택은 『환단고기』에 따르면 “황하 북류 동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훗날 당 태종이 이끄는 당군唐軍이 괴멸을 당한 곳입니다.

      보급로는 끊긴 데다가 장마철에 전염병까지 도는 바람에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된 수나라 진영에서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 가는 병사들이 속출하자, 퇴각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를 기다리던 강이식 장군 휘하 고구려군은 그들을 뒤쫓아 가서 완전히 섬멸하고 위풍당당하게 도성으로 개선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