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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9

대동법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서요 자세히 알려주세요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유명한 대동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서요. 방납의 폐단으로 농민의 부담이 증가하게 되어 대동법이 나온건 알겠는데 자세한 내용과 대동법 실시로 인해 어떤 결과와 영향을 주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아시는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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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뒤 세액도 12말로 통일하였습니다. 산간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쌀 대신 베·무명·돈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과 진상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따라서 백성에게 이중 부담을 지우는 경우가 생겼으며, 호당 징수가 결당 징수로 되었기 때문에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수입의 부족을 메웠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동법 [大同法]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4.19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세금은 크게 전세-토지세/공납-특산품/역-노동력....이렇게 세가지인데. 조선전기에 가장 농민들에게 부담되었던 세금이 특산품을 내는 공납이었고, 공납제도에서 나타난 것이 방납의 폐단 문제였습니다. 이를 개선해서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나온 제도가 대동법입니다.



    간단하게 국가가 각 지역의 특산품을 직접 받지 않고, 농민들에게 쌀이나 돈으로 내게 하는 제도가 대동법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동법 결과 양반 지주 부담이 커지고 농민 부담이 감소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인이 등장하여 도고가 성장하고, 상품 화폐 경제 발달을 촉진시켰습니다.

    한계로는 상공에 한정이고 별공과 진상은 존속했습니다.

    시일이 지날수록 상납미 비율이 높아지고 유치미 비율이 낮아지자, 지방 관아 재정이 부족해져서 수령의 농민 수탈이 심화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농민에게 가장 무거운 세금이 공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각지의 특산물을 거둬 조정과 관청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시행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폐단이 생겨났습니다. 방납도 있는데 방납은 관청에서 배를 거둔다고 했을 때 농민이 납부하는 배를 규격이나 품질이 떨어진다고 하여 퇴짜놓아 납부를 막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민은 배를 비싼값에 사서 납부해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인과 관청이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또한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전복을 공납품으로 하던지 해안가 마을에 산버섯이나 육고기를 내라는 식이 행해졌는데 이러면 마찬가지로 비싼 값에 사서 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공납품을 나르고 관리하는 일에 많은 비용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수미법이라 하여 이이나 유성룡 등이 주장했고 광해군 대에 처음 경기지역을 시초로 시작해 확대했습니다. 북방 2개도는 군사비와 사신접대비 등이 많이 발생해 잉류지역미라 하여 조정으로 납부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나머지 6개도에 확대되는 데에 백여년 넘게 걸리는데 양반지주와 관료층의 반대로 그리되었습니다.

    대동법을 시행하니 쌀이나 동전 등으로 거두어 이것을 가지고 조정이나 관아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서 사용하게 되었습다. 거두고 나르고 관리하는 비용이 대폭 줄어들었고 관청에 필요한 물건을 납품하는 공인층이 부를 쌓고 관련 유통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농민들 입장에선 농사 짓느랴 바쁜데 공물까지 마련하느라 농사 못 짓거나 혹은 토지를 팔아서 마련하는 등 폐해가 나타났는데, 대동법으로 쌀만 납부하면 해결되니 농민들의 부담이 덜어졌습니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시행되던 18세기 초엽까지만 하더라도 그 실시 결과는 극히 성공적이 였지만 그러나 18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날로 격화된 당쟁과 이에 뒤이어 전개된노론일파의 세도 정치는 정치기강의 문란과 함께 극심한 재정난을 초래하여 대동법의 정상적 운영을 저해하여 갔다고 합니다. 전라도의 경우, 이미 18세기 말엽에 대동미 징수량(약 米 147,000石)의 대부분이 상납미로 책정되어(米 144,000여 石) 서울로 수송되는 실태를 이루어, 이에 따른 지방 재정의 파탄과 이를 빙자한 지방 관원의 탐학은 대동법 실시 이전의 양상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비록 정치적 상황·추세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의 실시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에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재정면에서는 결과적으로 봉건적 지배체제를 지속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보겠지만, 사회·경제면에서는 이와 반대로 봉건적 질서와 체제의 이완·해체를 촉진시킨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