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대한제국시절 통감부의 외교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가 미국 오클랜드에서 1908년 전명운,장인환 의사에 의해서 사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던데 왜 이런일이 일어난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티븐스가 을사5조약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정미7조약을 맺어 고종을 협박하고 정부를 양도한
장본인이었기에 저격을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3일 일본에서 출발, 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합니다. 도착 즉시 그는 샌프랑시스코 크로니클 지와의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제목의 친일 성명서를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명운 선생 장인환 선생
한국외교고문 미국인 출신 스티븐슨 암살
미국인 수지분(스티븐스)이란 자는 1905년 6월 일본 정부의 추천으로 한국 외교고문직을 맡게 되었으니 각부의 일본인 고문과 동일한 인물이다. 이등박문이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 외부에 있으면서 극력 알선하여 일본에 충실하였다. 한국의 국록을 먹고 한국을 망하게 하였으니 그가 한 짓은 즉 인류라면 함께 할 수 없는 한국인의 구적.
전명운(田明雲, 1884년 6월 25일 ∼ 1947년 11월 19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1908년 친일파미국인으로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을 맡고 있던 D. W. 스티븐스가 귀국하여 일본의 보호가 한국에게 유익하며 한국인들도 환영하고 있다는 망언을 늘어놓자, 이 사실에 매우 격분하였다. 스티븐슨의 망언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에 보도되었고, 공립협회는 대동보국회와 공동으로 항의를 위한 4인 대표단을 구성했으나, 스티븐스는 대표들의 항의에도 극언을 계속하다가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 이틀 후인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여객선 선착장에서 일본인 총영사와 함께 있는 스티븐스를 공격했고, 격투가 벌어지자 같은 목적에서 별도로 대기하던 장인환이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 이틀 후인 3월 25일 절명하게 하는 중상을 입혔다. 그는 이때 장인환의 총격에 총상을 입고 장인환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공범 관계가 아님이 드러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네이던 코플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때 통역은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살인범을 변호할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함에 따라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맡았다.
그는 장인환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블라디보스토크로 잠시 이주했다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귀환, 그 곳에서 맥 필즈(Mack Field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1920년 결혼, 귀화하였다. 말년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장인환(張仁煥, 1876년 3월 10일 ∼ 1930년 5월 22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남도대동군(현 평양직할시) 태생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어 어렵게 자랐다. 숭실학교를 졸업한 이후, 1905년하와이로 이민을 떠났고 1906년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1908년 친일파 미국인으로 조선통감부와 밀착해 있던 더럼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에 격분하여 그를 저격하기로 결심했다.
3월 23일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 D.C.으로 떠나는 길의 스티븐스를 공격하려 하던 중 같은 목적으로 대기하던 전명운이 먼저 스티븐스와 격투를 벌였다. 그는 권총 세발을 발포하였는데, 한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잘못 맞았고 나머지 두발을 맞은 스티븐스는 중상을 입어 이틀 후 사망했다.
한인 사회에서 선임해 준, 당시 그의 재판을 맡은 네이던 코플랜(Nathan Coughlan)변호사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애국적 정신병(patriotic insanity) 이론을 근거로, "이 사건은 일종의 정신 질환 상태에서 저지른 것이므로 범죄가 될 수 없다" 고 항변했다.
재판 결과 금고 25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0년 만인 1919년 가출옥하였고, 1927년 귀국하여 결혼을 하였으나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이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30년 사망하고 말았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 한국인명 須知分,?~1908년)
스티븐스는1904년 12월 27일 대한제국 외부 고문관으로 임용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그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에 일본의 한국지배를 정당화시키고 국제 여론을 호도하려고 하였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스티븐스는 막대한 선전비를 뿌려가며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인물입니다.
1908년 3월 이토의 지시를 받고 휴가차 미국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배 위에서 기자들과 회견,
항구적인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무능한 한국이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를 받음은 물론 그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해3월 21일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국화를 환영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이같은 담화가 보도되자, 그날 밤 한인독립운동 단체 회원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취소를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오히려 대한제국 황제를 비난하고 한국인은 독립능력이 없다고 강변하자, 정재관이 스티븐스의 턱을 쳐서 때려눕히고, 다른 대표들은 의자로 그를 난타하고
대표들이 회관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보고하자, 이에 격분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곧 암살하기로 결심했는데, 상호 연락 없이 따로 진행시켰습니다.
3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페리 선창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전명운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발되자, 그에게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고, 이 와중에 도착한 장인환이 총탄 3발을 발사하여 스티븐스를 사살했으며, 장인환과 전명운은 즉시 미국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장인환의 거사는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1908년 3월23일자 석간인 「샌프란시스코 클로니클」은 『스티븐스는 한국의 公敵(공적)』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습니다.
「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는 일본의 한국통치를 정당화하고 두둔했다. 在美 한국동포들은 스티븐스를 숙소로 찾아가 일본 옹호발언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했다」
같은 날짜의 「뉴욕타임스」는 張仁煥 의사의 거사에 동정적이었습니다.
「미국 朝野에서 일본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확산될 무렵, 통감부는 駐日미국공사관 3등 서기관 스티븐스를 한국정부 외교고문관으로 추천했다. 1908년 2월 통감부는 스티븐스에게 1만 달러를 주고 일본의 한국 외교권 박탈 정책을 찬양하도록 알선, 미국으로 보냈다. 在美동포들은 스티븐스의 거듭되는 일본의 한국통치 정당성 주장에 분개해 그를 살해하게 됐다」사건 공판은 12월 7일 샌프란시스코 고등법원에서 개정되어 24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장인환은 실형이 선고되어 형기 25년의 금고로 판결되었으며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 저격사건은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던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독립운동에 전환점이 되었고, 해외의 항일투쟁을 고무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출처:네이버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8.3.23일 정명운 장인환의사가 미국인 외교관 더럼 W.스티븐스를 저격한 날입니다. 스티븐스는 미국 외교관이지만 일본의 이익을 관철하는데 충실했습니다. 그에 따라 조선인들의 반발이 거세졌고 결국 저격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스티븐스는 1908.3월 이토 히로부미의 부탁을 받고 미국스로가는 배안에서 일본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 조선을 병합했으며 무능한 조선이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막말을 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각신문사에 조선은 일본이 보호해주는 것에 찬성하는 분위기라고 왜곡했습니다. 그러자 조선대표 4명이 구타를 하였고 정명운 장인환 의사들이 암살계획을 세워 워싱턴 D.C로 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암살하였습니다. 재판에 이승만에게 통역을 부탁했으나 3000달러를 요구했고 교민들이 모금으로 만들어 건넸으나 끝내 변호하지 않았고 재미유학생 신흥우가 통역하고 미국 변호사 네이션코플네이 맡아 정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장인환은 2급 살인죄로 25년을 받았으나 모범수로 10년 형기를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