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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03.31

장미전쟁은 영국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요?

안녕하세요

영국의 장미전쟁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왕위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쟁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전쟁을 계기로 잉글랜드?영국이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전쟁이 영국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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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3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장미전쟁은

    1455∼1485년에 있었던 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영국의 내란을 말합니다.

    잉글랜드 왕이던 헨리 6세가 1440년에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의 설립과 케임브리지 대학 내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웅장한 예배당을 건립하다가 파산했고, 1453년경에는 그의 외조부인 프랑스의 샤를 6세의 혈통 때문인지 정신 이상의 증세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때 헨리 6세의 조카벌인 요크 공이 워릭(Warwick : 국왕 제조자란 별명을 가진 자)의 지지하에 헨리 6세를 감금하고 요크가의 19세된 젊은 에드워드 4세(1461~1483년)로 등극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4세 집안은 에드워드 3세의 다른 아들의 줄기로서 흰 장미 문장을 쓰는 가문이었고, 앞서 감금된 헨리 6세도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붉은 장미 문장을 쓰는 랭커스터 가문의 자손이었다. 이로써 두 장미 문장을 쓰는 왕실 집안의 추종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사병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기에 이를 '장미 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에드워드 4세는 그를 왕위에 올려 준 워릭이 자신에 대한 대우가 나쁘다는 이유로 다시 랭커스터 집안을 왕위에 올릴 의도로 반란을 일으키자 1471년 그를 제거하고 곧 헨리 6세와 왕세자까지 런던탑에서 살해했다. 이 당시 하원마저 일반 국민 대표가 중심이 아닌 귀족들의 독점물이 되어 강력한 절대 왕정이 생기는 배경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의회의 구성인들을 뽑는 선거인단들을 연 수입 40실링(20파운드)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자유민들에게만 주는 부패(과소) 선거구(Rotten Borough : 유권자가 격감하여 유력자가의 사물로 된 선거구)로 운영되었는데, 이 선거구는 이후 산업 혁명으로 발전하는 영국 사회에 걸림돌이 되다가 1832년 선거법 개정 때에서야 겨우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잔혹했던 에드워드 4세는 1483년 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동생인 글로스터 리처드(Gloucester Richard)에게 섭정을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글로스터 리처드는 왕위의 야욕을 갖고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을 에드워드 4세처럼 런던탑에서 살해한 후 스스로 리처드 3세(1483~1485년)로 등극했다. 이러한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 두 형제의 비도덕적인 왕가 내 살인극이 잉글랜드 세인들에게 염증을 느끼게 만들었고, 이는 장미 전쟁을 끝낼 기회가 왔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장미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리치먼드 공 튜더는 - 그의 모친 마거릿은 랭커스터 가문의 직계였다 - 세론이 좋지 못한 리처드를 징벌한다는 명목하에 리처드와 전쟁을 벌였다. 보즈워스 전투에서 대승한 헨리는 전세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모친 마거릿이 재가한 랭커셔 영주인 스탠리의 지지하에 리처드를 마지막까지 몰고 가서 그를 제거했다.

    이로써 왕위가 다시 요크 가문에서 랭커스터 가문으로 옮겨 가게 되었는데, 현명한 헨리 튜더는 더 이상 왕실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단호함을 보이면서 요크 가문의 여인이며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두 가문의 화합(두 장미의 결합)을 확고하게 하여 장미 전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헨리 튜더의 이러한 조치 후에 왕실의 상황을 보면 잉글랜드 내 왕실 귀족의 주요한 인물들이 거의 다 전쟁의 연기 속으로 사라진 뒤였기 때문에 그가 헨리 7세(1485~1509년)로 등극했을 때에는 확고한 왕권 강화를 이룰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미 전쟁 (영국사, 2003. 11. 10., 김현수, 위키미디어 커먼즈)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미전쟁은 국가의 분열을 야기시켰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요크 왕가와 랭카스터 왕가 간에 번갈아가며 왕좌를 차지하면서 국가는 내전 상태로 몇십 년간 분열된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장미전쟁은 귀족간의 전쟁으로 귀족의 세력 축소로 이어지고


    왕건의 강화로 나타납니다


    그만큼 장미전쟁에서 이긴 랭커스터가의 헨리튜더를 시작으로


    찬란한 튜더가문의 시작이 되었는데요


    헨리8세 메리여왕 엘리자베스1세 들도 다 튜더가문이죠?


    그만큼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절대왕권이 성립하고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초를 확립시킨것 같아요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미 전쟁은 15세기 영국에서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내전입니다. 전쟁은 처음에는 파괴적이었고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지만 궁극적으로 튜더 왕조 하에서 권력을 강화하고 보다 중앙 집권화된 군주제를 수립했습니다.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포함한 튜더 왕가는 영국 역사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영국에서 상대적인 안정과 번영의 시기를 감독했습니다. 그러나 장미 전쟁은 수천 명의 군인과 민간인의 죽음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이동을 포함하여 상당한 인적 비용이 발생했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잉글랜드에서 두 왕조의 힘의 대립으로 일어난 내전입니다. 이전에는 인근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왕실의 단결감이 강해졌었지만, 그 이후 왕실 내부에서의 힘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내전이 영국에 ***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왕권의 약화: 장미전쟁은 왕실 내부에서의 힘의 대립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잉글랜드는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시대로 접어들며, 왕권이 강화되기 전까지는 많은 정치적 불안과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 귀족의 강화: 장미전쟁 이후 귀족들은 왕권의 약화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는 잉글랜드의 귀족제도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경제의 악화: 장미전쟁은 잉글랜드의 경제적인 악화를 가져왔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잉글랜드의 농업과 상업이 피해를 입었으며, 내전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와 재산의 분실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4. 통일감의 강화: 장미전쟁 이후 테듀어 왕조가 전권을 잡으면서 잉글랜드는 중앙집권국가로서 통일감이 강화되었습니다. 이후 잉글랜드는 국가적인 단결감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해외 식민지를 확장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