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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과거 고대시대의 귀족들이 정말 금입택이라고 해서 금을 입힌 저택에 살았나요?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금입택이 삼국시대부터 용어가 나오더라구요. 요즘도 부자인 사람들이 집에 금을 입히는 건 안하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집에 금을 입혀서 살았던 귀족도 있다는게 역사적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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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감동스러운알알이51
      감동스러운알알이51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서에 그러한 저택이 있었다는 사료가 많이 등장하므로 자세한 건 아무도 모르지만 신빙성이 없는 주장은 아닌듯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주는 신라의 국가적 발전과 함께 대규모의 도시로 성장하여 통일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극도의 번영을 구가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제49대 헌강왕(憲康王)대에는 도성(都城)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고 밥을 짓는 데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썼으며, 집의 처마와 담들이 이웃과 서로 붙어 있으며, 노래 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고 묘사되고 있다.


      『삼국유사』권1 기이편(紀異篇)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시대에 수도인 경주에는 17만 8,936호(戶)가 살았고, 행정 구역은 1,360방(坊), 55리(里)로 나뉘었으며, 금입택이 35채 있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는 39채가 기록되었다. 신라의 전성시대란 삼국통일 이후 약 100여 년 간인 중대(654∼780)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성시대는 경주가 수도로서 가장 번성했던 신라 말기, 즉 헌강왕 때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입택으로는 재매정택(財買井宅: 김유신공의 조상집)을 비롯해 지상택(池上宅),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양상택(楊上宅), 한기택(漢岐宅), 비혈택(鼻穴宅), 판적택(板積宅), 김양종택(金楊宗宅),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衙南宅), 지택(池宅), 사상택(寺上宅), 교남택(橋南宅), 누상택(樓上宅)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름난 것만을 기록했을 것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금입택은 신라 말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고, 이미 중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금입택 중에는 삼국통일의 원훈인 김유신(金庾信)의 종가로 짐작되는 재매정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입택은 신라 통일 후, 지방에 광대한 전장(田莊)을 소유하고 많은 노비와 사병(私兵)을 거느렸던 귀족들의 막대한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귀족들은 화려한 주택을 지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이 골품제(骨品制)의 원리에 따라 상대등(上大等) · 시중(侍中) · 병부령(兵部令) · 장군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식읍(食邑) 혹은 녹읍(祿邑)을 받으며, 또한 통일 전쟁의 군공에 따라 막대한 포상과 전리품을 분배받음으로써 이룩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 금입택주는 경제력이 대단해 불교 사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9세기 말경의 금석문(金石文) 자료인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에는, 860년(헌안왕 4)경에 금입택인 ‘수망택’과 ‘이남택’의 두 택주가 금 160푼[分]과 조곡(租穀) 2,000곡(斛)을 보림사에 기부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또 이와 거의 같은 시기의 담양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에는 ‘지택’ 소유의 전답에 대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권4 백암사(伯巖寺) 석탑사리조(石塔舍利條)에는 백암사는 ‘북택’의 기진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금입택은 통일신라 고위귀족들이 사용하던 저택으로 넓은 토지에 정원을 만들고 가운데 큰 당을 세워 석회 대신 금으로 칠했던 호화저택을 말하는데 이는 신라의 기록 외에 일본 서기, 아랍제국의 기록에서도 등장하므로 실존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