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들은 잠행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왕들이 잠행을 하다가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라던가
왕이 진짜로 열받았거나, 만족했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또한 폭군이 잠행을 했을 경우
잠행이 끝난 후 못된 해코지를 한 경우도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왕이 평상복을 입고 몰래나가서 민심을 살피는것을 미복잠행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자기네 왕의 얼굴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는데, 왕이 미복잠행을 할 때는 안전을 위해서 대개 무술경호원이 동행하였습니다. ‘암행이 뚜렷한 목적과 목표를 갖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는 행동임에 비해 ‘잠행’은 특정한 목표없이 민생을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왕은 미복잠행을 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며 이를 국정운영에 참고하는 일이 많았고,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비방을 하는 등 마음에 들지 않는 백성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실록에 기록을 하는 사람은 사관정도로 원래 왕이 가는 곳마다 다 따라다녔다고 하니까 그때도 한명 정도는 따라다니지만 실제 따라가지 못했을 경우 주위 호위 모사등에게 듣거나 할 것으로 판단되나 말씀 하신 해코지를 한다거나 만족을 나타내는 역사적 기록은 별도로 확인이 안되네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임금이 잠행을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연산군일기'에는 '왕이 미행하기를 좋아해서 일부 성문을 지키는 군사는 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쓰여 있고, 밤에 환관을 거느리고 몰래 사냥을 나가는 등 여러 차례 미행을 나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영조 실록'에도 혜정교(현 종로구에 있는 다리) 서쪽 동네 이름이 '일영(日影)'이 된 유래를 과거 성종이 그곳으로 미행을 다니다가 붙인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왕세자가 궁궐에서 부왕(父王) 몰래 잠행을 나간 기록도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 입니다. 양녕대군은 세자였을 때 궁궐 담장을 넘기도 하고 개구멍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태종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고도 밤에 궁궐을 빠져나가서 부적절한 처신을 계속하다 결국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지요. 또 '계서야담' 등 야사(野史)에는 조선 제9대 왕 성종, 제22대 왕 정조 등이 궁궐 밖 민심을 살피고 백성들 고충을 들어주기 위해 미행에 종종 나섰다는 일화가 기록돼 있습니다.하지만 잠행 자체가 몰래 다녀 오는 것 이기에 잠행으로 인해서 누구를 해하고 처벌 하고 했던 기록은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맞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정기적으로 잠행을 했습니다. 잠행은 왕이 시종일관 국토의 안전과 국민의 복지를 위해 여행을 떠나며 지방을 돌아다니는 일입니다. 잠행을 통해 왕은 지방 관리에 대한 정보를 직접 수집하고, 지방 관료들의 검열을 시행하며, 지방 관리에 대한 불만을 직접 청취하는 등의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왕의 잠행은 지방의 관료나 백성들에게 경축의 기회를 제공하며, 지방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정종은 상왕이 된 뒤에 단기 미행도
즐겨하고 이른 새벽에 나가 밤까지
들어오지 않거나, 아예 며칠씩 외박도
즐겨했다. 이때 막 다니는 바람에 사간원에서 제발 어디 갈지 말을 하고,
호위를 데려가게 하라고 상소를
올린 것이 남아있다.
-출처: 나무위키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이 왕이 였을 때 자신의 여성이나 시녀를 탐한 사람을 발견하면 처형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잠행 중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 세조는 남녀노소 모두가 참가하는 동안 춘향전을 공연했고, 조선 중종은 잠행 중에 김시습에게 손자를 축복해주는 꿈을 꾸고, 조선 숙종은 인조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은 시를 쓰며 사과를 했습니다.
또한, 폭군으로 악명 높은 조선 고종의 경우에도 잠행에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고종은 종이들에게 징집을 강요하고, 물을 마시지 않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고종이 재위 중에는 대명루(大明樓) 건축을 몰수하려다가 대명루가 무너져 사망자가 발생한 일도 있었습니다.
잠행이 끝난 후 못된 해코지를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 세종은 한 차례 대전을 열었을 때, 상인들이 불법적인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징역과 처벌을 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대부분의 잠행에서는 참가자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