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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허스키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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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희룡은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조선시대의 인물 조희룡은 어떤 사람이었고 그가 지은 호산외기는 어떠한 책이었나요? 그리고 그 당시 사회상은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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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희룡의 문인 서화가로서의 활동은 대체로 여항문인권 안에서 이루어져 있으며, 1844년(56세)에 저술한 여항인의 전기인 ‘호산외기(壺山外記)’를 통해서 교유관계와 여항인으로서의 문제의식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 ‘화구암란묵(畵鷗盦讕墨)’,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조희룡은 시 · 글씨 · 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글씨는 추사체(秋史體)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墨蘭畫)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다. 그는 추사체의 서예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채색으로 화사한 나비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나비 그림의 명화가 남계우(南啓宇)보다도 한 세대 앞서 있었다.

      회화 작품은 산수화,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로 나눌 수 있다. 특히 2년 동안의 귀양 기간에는 마음을 회화에 기탁하며 제작에 전념하였다.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 그림인데, 이와 같은 자신의 매화에 대한 애정을 ‘석우망년록’에 상세히 적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叟)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간송미술관 소장)는 이와 같은 그의 생활 주변의 모습을 표현한 듯한 재미있는 그림이다. ‘매화서옥도’는 근경의 나무와 서옥, 원경의 산을 화면에 맞게 배치하였다. 남종산수화의 구도와 화법을 배우며 자신의 화법을 모색하였다. 필치에서는 미가산수(米家山水)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데 미점(米點)이 점차 활달해져서 서예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조희룡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인 ‘홍백매화도(紅白梅花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여러 폭으로 연결된 화면에 역동적인 매화 가지의 동세와 화려한 홍매(紅梅)와 백매(白梅)의 꽃이 어울려 장식적인 미감을 이룬다. 이 그림은 두 그루의 매화가 커다란 화면 전체에 펼쳐져 있는 본격적인 전수식(全樹式) 병풍이다. 병풍 전면에 걸쳐 용이 솟구쳐 올라가듯 구불거리며 올라간 줄기는 좌우로 긴 가지를 뻗어내고, 흰 꽃송이와 붉은 꽃송이가 만발해 있는 걸작이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이전 시대에 묵매가 많이 그려진 것과 달리 이 작품과 같이 청대 화풍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색채의 홍백매(紅白梅)가 많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의 오른쪽에 적힌 글에서 조희룡은 자신의 매화 그림이 기존의 화론(畵論)에서 말하는 화법(畵法)이 아닌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의 서법(書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점점이 피어 있는 화려한 매화는 ‘은하수에서 쏟아 내린 별 무늬’와도 같고, ‘오색 빛깔 나부산(羅浮山)의 나비를 풀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예술세계에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는 절정의 단계를 나비가 훨훨 나는 것에 비유하였다.

      또 다른 매화 그림인 ‘홍매도(紅梅圖)’는 길고 좁은 축화(軸畵) 형식의 그림이다. 새로운 구도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굵은 노수간(老樹幹)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피운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주간(主幹)과 서로 대조와 조화를 이룬다. 조선 중기 이래의 전통인 간결한 화매법(畵梅法)과 구도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중국 청대 매화도의 영향이 컸다. 이처럼 조희룡은 기법과 구성을 다양하게 응용하여 대담하고 표현적으로 매화를 그렸다.

      글씨에서는 추사체의 서예에 뛰어났고, 다만 김정희의 필세에서 보이는 거친 표현이 조희룡의 서풍(書風)에서는 좀 더 유연함으로 변용되었다. 조희룡은 진위와 관계없이 첩학(帖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는 김정희가 청대 고증학의 영향으로 첩의 진위(眞僞)에 관심을 두었고, 비학(碑學)을 중시했던 것과 다른 점이다. 또한 조희룡은 수예(手藝)를 강조하면서 서화가에게 있어서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 또는 흉중성죽(胸中成竹)보다도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솜씨와 재예(才藝)를 필수 요건으로 여겼다.

      조희룡은 글씨를 쓰는 데 있어 하나의 작품에 다양한 서체를 혼합하여 적용하기를 즐기었고 형식에서 벗어나 파격을 추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조화미를 이루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추사의 서풍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성 확보를 위해 고심한 흔적이 드러난다.

      이러한 글씨에 대한 그의 관점은 그림에서도 나타났다. 종전의 단순 ∙ 간결한 매죽 그림과 달리 등걸이 굵고 가지가 무수히 많아 무성하고 거기에 매화가 만발하여 화면을 꽉 채우고 갈지(之)자로 요동치는 구도의 매화뿐만 아니라 대나무에서도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구도와 담채의 대범한 필획의 구사, 거침없는 필치의 자유로운 운용, 거리낌 없는 표현력을 통해 동적이고 힘찬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출처: 미술백과 조희룡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그린 봄날 산속에 매화가 핀 풍경. 조희룡은 매화를 사랑하여, 자신의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 불렀을 정도였던 인물이었다

      조희룡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가로써 조선에서 매화를 가장 잘 그리는 화가로 대표작으로는 홍매도대련, 매화서옥도 등이 있는데 조희룡의 예술세계를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정신으로 상징되었으며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 문인화의 시대를 개척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중국과 우리나라 회화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청나라 화적을 직접 소장하고 비평을 하는 등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었다. 화론에서는 수예를 강조하고 재능을 중시하여 서화가에게는 학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재주, 즉 기량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