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에는 세상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회색지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적/심리학적 시선으로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지 고민해봤습니다.
1. 선악의 이분법에서 인간의 다면성으로
아동기에는 스위스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피아제가 말한 타율적 도덕성의 단계를 거칩니다. 규칙은 절대적이며, 주인공은 무조건 착하고 악당은 무조건 나쁘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니체가 말한 선악의 저편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됩니다. 후크선장은 피터팬에게 손목을 잘리고 시계 악어에게 쫓기는 트라우마를 가진 피해자이기도 하고, 우르술라는 왕국에서 추방당해 소외된 외로운 존재라는 맥락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악당의 악행 뒤에 숨겨진 상처와 결핍을 읽어낼 만큼 우리 시야가 넓어진 것입니다.
2. 주인공의 특권에 대한 현실적인 자각
어릴 때는 스스로가 세상의 주인공인 줄 알았습니다.
신데렐라나 알라딘처럼 마법 같은 행운(요정 할머니, 지니)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 믿죠. 하지만 현실을 살아본 후 깨닫습니다. 디즈니 주인공들은 태생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가만히 있어도 왕자가 구원해 주고, 심바는 타고난 왕족입니다.
반면 악당들은 어떤가요? 가스톤은 마을 최고의 사냥꾼으로서 나름의 노력을 인정받은 인물이고, 자파는 2인자의 자리에서 신분 상승을 위해 온갖 책략을 쥐어짜는 평범한(?) 흙수저 야심가에 가깝습니다.
마법이나 혈통이라는 사기적인 특권을 가진 주인공들에게 처절하게 짓밟히는 악당들의 모습에서, 어른들은 묘한 동병상련이나 부조리함을 느끼게 됩니다.
3. 내 안의 그림자를 발견하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의 마음속에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모습인 그림자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이를 거부하지만, 어른들은 살아가면서 질투, 탐욕, 권력욕 같은 감정을 스스로도 느껴봅니다. 크루엘라의 집착, 자파의 야망, 말레피센트의 서운함과 분노는 사실 우리 마음 한구석에 있는 솔직한 욕망들입니다.
악당들이 비참하게 파멸하는 모습을 볼 때, 어른들은 내 안의 부끄러운 약점들이 처단당하는 것 같은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 악당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때가 묻어 도덕성이 흐려진 걸까요? 아니면 타인의 아픔과 한계를 더 깊이 포용할 수 있게 된 성숙일까요?
만약 당신이 새로운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면, 처음부터 악당의 슬픈 과거를 친절하게 다 보여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나요? 아니면 지금처럼 어른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악당의 슬픔을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나요?
책 한권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