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직전 한달전까지 건강했던 정조가 급하게 사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망직전 한달전까지 정조는 건강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이 정조가 종기를 앓고 있었고 사망하기 며칠전에 인삼을 먹고 곧 며칠뒤 사망을 하였다고 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기 합니다만 하나의 설에 불과하고, 정조 자신이 건강 관리를 잘 못한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조는 술을 아주 좋아했는데, 한번 술을 먹으면 정신을 잃도록 먹고, 신하들에게 술이 취하도록 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담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그의 건강의 헤치는 결과를 낳았던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의학적으로 사망 원인은 독살설도 존재 하지만 정조의 죽음과 관련, 독약 중독에 의한 타살보다는 패혈증과 뇌졸중 (중풍) 등의 기저질환이 사망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기 말년 정조는 병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정조 24년 6월 28일 왕은 위독한 상태에 빠졌고 의원들의 집중 처방에도 증세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날 저녁 병석에 누운지 보름만에 정조는 죽게됩니다. 승정원 일기에 정조 독살설 기록이 나옵니다. 누군가 왕의 죽음에 의관이 개입되었음을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정조가 사망한 지 두달만에 인동부(지금의 구미)에 사는 영남 유학자 집아의 장시경이라는 자는 의혹을 제기하고 형제 및 노비들과 정조를 죽인 역적을 칠 것을 모의하다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정조의 죽음은 선비들이 목숨을 걸만큼 의심스러웠습니다. 독살설 또는 가설일지라도 이는 그만큼 당시의 치열한 당파싸움을 상징합니다. 의심1 수은중독입니다. 의심2 내의원들의 수상한 동태 등입니다. 한의학자들은 1. 치료시기는 놓친 것 2. 연훈방과 성보고를 단기간에 다량으로 사용한 것 3. 치료가 완치되지 않았는데도 경옥고를 처방하고 기름진 음식으로 몸을 보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위 세 가지 이유로 정조의 죽음에 의심을 갖지만 정조는 홧병으로 인한 종기에 의해 죽은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와 같은 경우에도 스트레스도 심하였으며
잔병치레도 많았고 술담배를 즐겼으며 상당한 업무를
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시대에는 50세를 넘기기 어려웠던
시대상황을 보면 건강하진 않았습니다.
독살설 등은 가능성이 적어보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는 조선왕 독살설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석연찮은 점과 정치적 논란 때문에 노론 지도부인 심환지와 정순왕후의 주도로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암살론이 제기되었으나 최근 심환지와 정조가 비밀리에 주고받은 서찰이 공개되어 수그러든 감이 있다. 사실 오회연교와 관련해서 전후 사정을 따져본다면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함께 해야 할 당파의 영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암살론 자체가 나오게 된 계기는 정조의 사후 정약용이 직접적으로 시상(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언급)한 것이 큰데 조선시대에 무고죄를 극형으로 다스린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정약용이 무슨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 부분 자체도 심환지와 당시 문제의 어의인 심인이 인척 관계인 점을 고려하면 나올 만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야음을 탄 독살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진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권 기간에도 여러번의 독살 위험에 노출되었기에 정조 암살론이 단순한 억측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목소리가 있다. 문제는 다른 어의들과 달리 심인에 대해서는 꾸준히 공격적인 공세가 이어진다는 점과 심환지의 졸기 등에서 사관들이 심환지를 공격하는 부분 등이 암살설의 근거가 되는 것. 정순왕후의 경우에도 기록을 잘 보면 사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고, 죽기 직전 '수정전'을 언급해 정순왕후를 오게 한 것을 보면 서로의 신뢰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암살론의 여러 근거 때문에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 이덕일 등의 작가와 학자들은 계속하여 암살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암살설이 영향인지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독살된 걸로 진행된 편이라고 한다. 암살론자들은 오회연교 등 정치적으로 격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첫날에는 연훈방 처방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스스로 언급한 다음 이어서 연훈방을 처방했을 때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사실상 급사해버렸기 때문에 독살설 주장이 더욱 맹렬한 것.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정조가 단명한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애연가에 주당에 식사도 불규칙하게 했고 본인 스스로도 잦은 질병을 앓고 고통스러워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데다가 왕을 과로사로 몰고 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의 정치 체제를 충실히 따르다 못해 훨씬 과격하게 보낸 인물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로 인해 정조의 과격한 처방법을 두고 정조의 의술에 대한 논쟁도 발생했다. 여기서 《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정조의 성격도 요절설과 독살설에 의혹을 지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인지라 신하들과 갈등이 많았는데 재위 기간 24년 동안 《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과 논쟁만 해도 5차례~6차례나 될 정도다. 조선 왕의 특성상 과로는 기본인데다 정조의 경우 스트레스와 잔병치레가 잦았고 술담배를 즐겼으며 한 사람이 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밀어붙인 점 등을 고려하면 49살에 죽은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당시에는 50세만 되어도 잘 살았다고 하던 때였고 60대까지 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5%도 되지 않던 때였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종기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또한 정조가 유별나게 조선 왕 가운데 급격하게 사망하거나 일찍 죽은 것이 아니다. 정조는 무려 24년을 재위했다. 조선 왕 가운데 절반 이상은 정조보다 짧게 살았고, 정조보다 짧게 재위했다. 나름대로 꽤 장기간 집권한 이미지가 있는 태종은 18년 재위하였으며, 북벌을 주창하며 의욕차게 일했던 효종은 11년도 재위하지 못하고 죽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듯한 세도정치를 겪었던 헌종도 15년을 간신히 넘겼으며, 굉장히 오래 재위했을 것 같은 세조는 14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사망했다. 게다가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영조의 발자취 덕분에 즉위한 직후부터 사실상의 실권을 틀어쥐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정조는 조선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오랫동안 재위하면서 장기간 실권을 휘둘렀던 왕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망이 급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1800년 5월 30일 정조는 대전에서 신하들과 또다시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오늘 부로 난 신하들과 일체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다.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다. 이 말인 즉슨 갈등의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는 점이며 정조가 정치적으로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약 4주 뒤인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끝내 승하하게 된다. 승하하기 직전에 벌어진 신하들과 논쟁에서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질병인 종기를 악화시켜 1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역대 조선 왕들이 앓던 고질적인 지병인 종기를 앓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종기에 고름으로 굉장히 고생했다. 그 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열악한 의료 기술 탓에 종기를 어떻게 손 써보지도 못하고 인삼을 넣은 탕약만 마시다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