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14살꿈많던아이
같은 교향곡인데 지휘자마다 왜 이렇게 다른 템포로 연주하나요?
같은 베토벤 교향곡도 카라얀이 지휘한 것과 다른 지휘자가 지휘한 게 템포나 분위기가 다르다고 들었는데, 악보가 정해져 있는데도 이런 해석 차이가 왜 크게 나타나는지 궁금합니다.
1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전문가입니다.
같은 베토벤 교향곡인데도 카라얀, 푸르트벵글러, 클라이버 등이 전혀 다른 음악처럼 들리는 이유는 ‘악보에 적힌 것’과 ‘악보에 적히지 않은 것’의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1. 악보는 음악의 모든 것을 적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베토벤의 악보에는 음높이, 리듬, 박자, 강약, 악기 편성, 아티큘레이션 등이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프레이즈를 얼마나 길게 끌 것인가
미세하게 빨라졌다 느려지는 정도
음 하나하나의 무게
화음의 긴장감을 얼마나 강조할 것인가
악기 사이의 균형
클라이맥스를 얼마나 크게 만들 것인가
같은 템포라도 실제로 느껴지는 추진력
쉼표를 얼마나 극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그래서 악보는 일종의 설계도에 가깝습니다.
2. 특히 템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 5번 교향곡의 유명한 첫 부분을 생각해보면,
따다다단!
카라얀이 빠르고 강한 추진력을 선택하면 음악이 굉장히 날카롭고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것처럼 들립니다.
반대로 푸르트벵글러처럼 템포를 크게 유동시키는 지휘자는 같은 음표를 연주해도
“운명이 밀려왔다가 잠시 멈추고 다시 폭발하는 것”
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악보에 '여기서 5% 느리게, 여기서 8% 빠르게'라고 적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지휘자가 해석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단순히 빠르고 느린 차이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프레이징입니다.
성악으로 생각하면 아주 쉽습니다.
똑같이
“그대여, 나를 떠나지 마오”
라는 악보가 있어도 어떤 성악가는 첫 단어를 아주 길게 끌면서 호흡을 크게 가져가고, 다른 가수는 말을 하듯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음정과 리듬은 똑같지만 문장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지휘자도 똑같습니다.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가지고 프레이즈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카라얀의 베토벤이 특별히 '카라얀답게' 들리는 이유
Herbert von Karajan의 베토벤을 들으면 흔히 느끼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매끄럽고 압도적인 음향과 긴 호흡입니다.
그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소리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반면 Wilhelm Furtwängler의 베토벤은 템포의 큰 유동과 극적인 긴장 형성이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Carlos Kleiber의 베토벤은 놀라운 추진력과 리듬적 생동감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베토벤의 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꾼 것은 아닙니다.
같은 악보를 놓고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 → 어디로 음악을 끌고 갈 것인가 → 어디에서 긴장을 만들고 풀 것인가
에 대한 판단이 달랐던 것입니다.
5. 이것이 바로 '해석'입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에서는 재미있는 역설이 생깁니다.
악보가 정확하게 정해져 있을수록 연주자의 해석 차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할 때 모든 오케스트라가 음을 정확히 똑같이 연주한다면 오히려 지휘자의 존재감이 거의 없어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음 → 다른 악센트 → 다른 프레이즈 → 다른 템포 → 다른 긴장 → 전혀 다른 음악적 경험
이 만들어집니다.
이 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산조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산조에서는 정해진 선율의 틀 안에서 연주자가 시김새와 리듬, 호흡을 통해 자기 음악을 만들고, 베토벤 연주에서도 정해진 악보의 틀 안에서 지휘자와 연주자가 해석을 통해 자기 음악을 만듭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있습니다.
산조는 전통적으로 즉흥적 변형의 여지가 훨씬 크고, 베토벤 연주는 악보에 대한 충실성이 훨씬 강한 체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클래식 연주를 이해할 때 **“악보 = 문장, 연주자 = 배우”**라고 생각하면 아주 이해하기 쉽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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