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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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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원균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픽션이나 소설, 영화 이외에 각종 역사적인 사료를 근거로 보았을 때, 조선시대의 원균은 실제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대기를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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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균1540년(중종 35)~1597년(선조 30)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활약한 무신으로 이순신과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1592년(선조 25)에는 경상우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경상우수영 관할하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조정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고군분투하다가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하여 옥포·당포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하여 불화가 발생하였는데,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하였으므로 이듬해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자, 1597년 2월에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상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균은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므로 하옥시키고, 백의종군하게 함으로 명량대첩으로 큰 승리를 거둔 것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식이 수정자를 붙여 기록해 놓은 '선조수정실록'에는 원균이 권세에 관심을 가지면서 날로 이순신을 헐뜯었다라고 전해진다. 이 책에서 이순신의 죄목을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1. 임금을 속이고 조정을 업신여긴 죄-부산에 들어와 있던 일본 군영의 방화 사건에 따른 허위보고였다는 것이다. 일본 군영에 방화를 한 이는 정희운의 심복인 하수석이 일본 군영에 불을 질렀는데, 이순신이 스스로의 공인 것처럼 허위 장계를 올렸다는 것이다.

    2. 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를 망친 죄-조정의 명을 어기고 가토 기요마사를 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3.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하 죄-초기 해전에서의 승전 소식을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가로챈 죄라는 것이다. 이때 해전을 지휘한 자는 원균이었으나 이순신 자신이 공을 세운 것을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4.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죄-이순신은 조정에서 여러 번 독촉하여 적을 치라는 멸령에도 움직이지 않았고 임금을 대신한 세자가 현지로 가서 그를 불렀음에도 오지 아니함으로 왕권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순신은 하옥되었고, 이와 같은 죄명으로 원균을 모함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언제나 역사는 승리한 사람의 역사이며, 진실은 가끔 묻혀지기도 한다. 다만 원균 역시 나라를 위해 충성한 장군이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패전으로 거제도로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 장군은 진짜 존경할 분이다. 원균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여러가지 오해와 진실이 교차해 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평중으로 1540년 평택 도일동의 무인 가문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무과에 급제 후 조산만호로 북방에 있을 때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부령부사로 특진, 이후 전라좌수사에 천거되기도 하나 평판이 좋지않다는 탄핵이 있어 부임되지 못합니다.

    159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세달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원균은 그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경상우수영의 모근 배를 불태워 가라앉히고 퇴각,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이던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 이순신은 5월 2일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섭니다. 이순신과 합세해 옥포해전에서 적선 26척을 격침시킨 후 합포해전,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격퇴했습니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의 휘하에서 지휘를 받게 되며 그는 이순신보다 경력이 높았으므로 조정의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 마찰을 가졌고 두 장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됩니다. 이때 원균은 자주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하며 원균은 해군을 떠나 육군인 충청절도사로 전출되어 상당산성을 개축 이후 전라좌병사로 옮겼습니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가 쳐들어오자 수군이 앞장서서 막아야 한다는 것에 반대해 출병을 거부한 죄로 수군통제사를 파직당하고 투옥되자 원균은 이순신의 후임으로 수군통제사가 되었고 그해 6월 가덕도해전에서 패, 7월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의 유인전술에 속아 대패하여 전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균은 조선시대 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좌병사 등을 역임한

    무신입니다.

    1540년(중종 35)에 태어나 1597년(선조 30)에 사망했으며, 경상우수사

    재직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방적으로 패주하다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원병이 합세하면서 연전연승한

    인물입니다. 정유재란 때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조선시대의 원균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원균은 본래 이름이 아니며, 그의 법명은 선윤입니다. 원균은 조선시대 중기인 16세기에 살았으며, 조선 제13대 왕인 명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원균은 어린 시절부터 문집으로서 교육을 받았고, 그의 학문적인 업적과 성실한 인격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약용과 함께 조선의 문신으로 활약하였으며, 경제 정책, 법률 개혁, 훈민정음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했습니다.

    원균은 유교적인 가치와 도덕적인 교훈을 중시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실용적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저서인 "국조론"은 조선시대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론적인 지침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는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기여하였으며, 한글의 보급과 국민교육에 역할을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원균은 조선시대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며, 그의 업적과 사상은 조선시대의 문화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