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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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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양현고와 섬학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고려시대 무신 정권기에 교육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다시 관학의 진흥에 힘썼고 국학을 성균관을 개칭하고 문묘를 새로 건립하여 유교교육의 진흥에 나섰다고 하던데요. 궁금한게 그당시 교육재단인 양현고와 섬학전의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요. 아시는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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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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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나라하리
    빛나라하리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현고 > 고려시대 장학재단 으로 1119년 사학의 융성으로 위축된 관학의 진흥을 위하여 설치 하였습니다.

    예종은 이전의 국자감을 국학으로 고치면서 일대 개혁을 단행,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사를 신축함과 동시에 학생의 교육 및 국학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하여 국학 안에 이 관청을 설치 하였습니다.

    섬학전 > 고려시대 안향의 제의에 따라 국학생들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하여 관리들이 품위에 따라 낸 장학 기금 입니다.

    안향은 원나라에서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던 중 국학이 날로 쇠퇴해감을 걱정하고 1304년 조정에 건의하여 유학의 진흥을 위한 장학기금을 문무관리 6품 이상은 은 1근씩, 이하는 포를 내게 하였습니다.

    이를 섬학전이라 하는데 기금을 양변기에 귀속시켜 섬학고라 하고 그 이식으로써 학교의 운영하도록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현고는 1119년(예종 14)에 처음 설설치되습니다. 예종은 당시 사학(私學)의 융성으로 위축된 관학을 진흥하기 위하여 교육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사(學舍)를 설립하고 유학생(儒學生) 60명과 무학생(武學生) 17명을 입학시켜 이들의 교육과 국학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하여 국학 안에 양현고를 설립하였습니다.


    처음에는 2인의 판관(判官)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으나, 1243년(고종 30)에는 4인을 두어 2인은 양현고에 속한 토지가 있는 곳으로 파견, 세를 거두어 운반하도록 하고 2인은 양현고에 남아 있으면서 이를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뒤 고려 말에 와서 국학이 쇠퇴하고 양현고의 재원도 고갈되자 안향(安珦)은 섬학전(贍學錢)을 만들어 양현고에 귀속시켜 교육진흥을 꾀하였습니다. 또한, 1308년(충렬왕 34)에 은 50근을 양현고에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섬학전은 안향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던 중 국학이 날로 쇠퇴해감을 걱정하고, 1304년(충렬왕 30) 조정에 건의하여 유학의 진흥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문무관리 6품 이상은 은(銀) 1근씩,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였습니다.


    이를 섬학전이라 하는데 기금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섬학고(贍學庫)라 하고 그 이식으로써 학교를 운영하도록 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채택하였고, 왕은 내탕(內帑)의 전곡(錢穀)을 내어 이것을 도왔습니다.


    한편, 안향은 그 갹출의 일부 자금으로 김문정(金文鼎) 등을 원나라에 보내 공자와 그의 제자 70자(子)의 상을 그려오게 하고, 여러 서적과 제기·악기 등을 구하여 오도록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