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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매미372
젊은매미37223.05.08

인조의 삼전도 굴욕은 무엇인가요

조선시대의 왕중에 인조는 삼전도 굴욕을 겪은 왕이라고 하는데 삼전도 굴욕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외적의 침입에 굴욕을 당했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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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8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7년 2월 24일(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말이 강화조약이지 항복이나 다름없었다)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실록의 기록(효종실록, 현종실록 등)을 보면, 정축년 1월 초에 성에서 내려왔다는 의미로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고 했다. 그나마 실록에 기재되긴 했지만 전후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임진왜란보다 더 비참했던 만큼 병자호란 전후의 사정을 보고 이 부분을 보면 엄청나게 순화했다고 느낄 정도로 비교적 검열삭제해서 쓰인 편이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및 석촌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터였다. 지금 그곳은 개천을 메워 섬이 아니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적어둔 비석인 삼전도비가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남아있었는데 2007년 페인트 또는 스프레이로 테러가 있은 후 2010년 복원하여 원래 있었던 위치인 롯데월드 석촌호수 근처로 돌아갔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조선왕조 최대의 굴욕으로 취급되었다. 한낱 번국 오랑캐라며 무시한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에게 만인지상의 임금이 머리 박고 항복했다고 합니다.

    출처: 나무위키 삼전도의 굴욕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을 반정으로 쫓아내고 임금에 오른 인조와 서인 남인 연합정권은 친명배금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여진족인 후금의 침입을 받는데 정묘호란이라고 합니다. 형제관계를 맺었는데 정책의 변화가 없자 후금이 청으로 선포한 이후에 조선을 재침하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합니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 항전을 하려하였으나 청군에 막혀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식량은 떨어지고 어려움을 겪다 항복하게 되는데 송파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배구고두라는 인조가 땅에 이마를 찧으며 의식을 하는데 이마에 피가 흥건하였습니다.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합니다. 군신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후 청은 산해관을 넘어 명을 무너뜨리고 중원의 새주인이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되자 청나라에게 복수하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는데요.

    허나 왕권 및 군사력 강화 측면에서만 사용되어 북벌론은 점점 사그라들었고 이후 실학이 성행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만 여전히 조정 중신들 사이에서는 북벌론이 대다두여서 크게 성행하지는 못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이 청나라와의 전쟁에 패하여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를 숙이는 굴욕적인 의식을 한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