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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찰스 1세를 국왕을 죽인 크롬웰은 편안하게 죽었나요 어땠나요

영국 국왕이었던 찰스 1세는 영국 내전에서 패하여 결국은 참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주역이 크롬웰인데 왕을 죽이고 그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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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크롬웰은 1658년 9월 3일 독감으로 사망했고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안장되었습니다.

    말년에 가면 크롬웰은 요로결석과 말라리아를 심하게 앓을 정도로 건강이 나빴고 사망원인도 이 두개의 질병이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크롬웰은 1628년 헌팅던(Huntingdon)에서 하원의 의원이 되었으나,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1649)는 이듬해 의회를 해산하여 그 뒤 11년 동안 소집하지 않았다. 1631년 크롬웰은 소유한 땅을 처분한 뒤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엘리(Ely)로 옮겼다. 이 시기에 크롬웰은 찰스 1세의 세금 및 부과금, 종교 정책에 비판 의식을 지닌 청교도(淸敎徒)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1640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자, 크롬웰은 단기의회(Short Parliament), 장기의회(Long Parliament)에서 케임브리지(Cambridge)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했다.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10월 에지힐(Edgehill)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워 군사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기병연대를 편성하여 훈련시켰으며, 그의 부대는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1643년 7월 게인즈버러(Gainsborough) 전투, 1644년 마스턴무어(Marston Moor) 전투 등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기병대는 철기대(鐵騎隊, Ironsides)라는 명성을 얻었다. 1645년 의회파는 그의 부대를 본떠 신형군(New Model Army)을 편성했으며, 크롬웰은 이를 이끌고 네이즈비(Naseby)와 랭포트(Langport)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646년 찰스1세가 머무르고 있던 옥스퍼드(Oxford)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1647년 1월 찰스 1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1648년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찰스 1세가 아일오브와이트(Isle of Wight)로 탈주하면서 제2차 내전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웨일스(Wales)로 원정하여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잉글랜드로 침입해 오던 스코틀랜드(Scotland)군을 프레스턴(Preston)에서 격파하였다. 1649년 1월 30일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귀족원을 폐지하여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세웠다.

    공화국에서 크롬웰은 국무회의(Council of State) 의장이 되었고,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 의석의 재분배, 법률상의 완전한 평등 등을 요구한 수평파(Leveler)를 탄압하였다. 그리고 1649~1651년에 왕당파의 중심지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벌에 나섰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1685)를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는데, 크롬웰은 1650년 9월 던바(Dunbar)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쳤고, 1651년에는 잉글랜드로 공격해오는 찰스 2세(Charles II)를 우스터(Worcester)에서 물리쳤다. 결국 1651년 10월 찰스 2세가 프랑스로 탈출하면서 10년 동안 계속된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은 끝맺게 되었다.

    1651년 크롬웰은 네덜란드 중계무역상의 활동을 제한하는 항해조례(Navigation Acts)를 제정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의회에 대한 군대의 불만이 높아지자 1653년 4월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7월 4일 자신이 지명한 사람들로 의회(Barebone's Parliament)를 구성했다. 하지만 12월 지명의회마저 해산시키고,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호국경(Protectorate) 정치를 시작하였다. 1653년 12월 16일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랐다.


    호국경이 된 크롬웰은 1654년 9월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1655년 1월 해산하였고, 1656년 9월에 소집된 의회도 1658년 2월에 다시 해산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법률 개혁과 교육 진흥 등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유대인의 입국을 허용했으며, 라틴어 교육을 담당하는 중등학교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1655년 왕당파의 반란이 다시 일어나자, 전국을 10여개의 군사구역으로 나누어 군정장관을 배치하는 등 군정(軍政)을 강화하였다. 크롬웰은 1658년 병으로 런던(London)의 화이트홀(Whitehall)에서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1712)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멍크(George Monck, 1608~1670)에 의해 1660년 왕정이 복고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다. 왕정 복고 후에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그의 시신도 꺼내어졌다.

    출처 :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찰스 1세를 처형한 핵심 인물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사실상 지도자로써 통치했었습니다. 그는 1658년 9월 3일 말라리아 및 신장 결석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1658년 9월 3일 크롬웰은 독감(사실 말년에 가면 크롬웰은 요로결석과 말라리아를 심하게 앓을 정도로 건강이 나빴다. 사망한 원인도 이 두 개의 질병이 악화되었던 것.)으로 사망했고, 크롬웰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안장되었다.

    그리고 왕정복고가 일어나고 찰스 1세 처형 12주년인 1661년 1월 30일에 크롬웰을 증오하며 복수심에 불타던 찰스 2세의 명령으로 크롬웰은 무덤이 파괴되어 시체가 분해되는데, 머리를 베고 몸통을 4조각내어 시가지에 걸어놓아 온갖 수치를 당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