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자스-로렌 지역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과거부터 독일과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역을 두고 꾸준한 마찰을 보였다고 하는데요.
알자스-로렌 지역의 역사가 알고싶습니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는 왜 이 지역을 두고 분쟁을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의해 강제로 독일에게 이양된 알자스·로렌 지역은 1874년까지 혹독한 군사 독재를 경험했다. 대략 25만의 알자스·로렌 지역의 주민들이 그들의 자산을 버리고 프랑스로 이주했다. 또, 의무적인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탈영했다. 1879년에서 1888년까지, 독일은 일부 자치를 허용하는 완화책과 강경책을 번갈아가며 시행했다. 알자스·로렌 주민들은 '독일화(germanisation)'에 체계적으로 저항했다. 불어 사용에 대한 강제 추방이나 투옥 같은 독일 정부의 강압적인 조치로 인해 독·불 간의 긴장은 한층 고조되었다.
프랑스는 결코 알자스·로렌 지역 탈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의 눈은 언제나 국경을 바라보네. 메츠(Metz)의 벽에서 스트라스부르의 종루까지, 우리의 전체 프랑스를 꿈꾸며 나는 일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걷네." 시인 폴 데루레드(Paul Dérouléde)의 애국적인 시들은 초등 학교에서 배우고 낭송되었으며, 프랑스 국민의 의식 속에 '잃어버린 지방'에 관한 추억을 강렬하게 일깨웠다. "우리가 전쟁에서 다시 승리하는 그 날, 상처받은 조국은 알자스·로렌 지역을 다시 탈환하리라."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알자스·로렌 지역의 문제는 프랑스와 독일 관계를 좌우했으며, 프랑스에서 민족주의를 고양시켰다.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심은 제네바 사건을 계기로 하는 1887년 블랑제 사건, 1913년 차베른 사건 등을 야기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휴전 뒤 프랑스군이 진주하자, 주민 대부분이 이를 환영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알자스·로렌은 또다시 프랑스령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중앙 집권 강화 행정은 독일 제국 시대에 특히 알자스 주민들 사이에 형성된 자립 감정과 맞섰고, 또한 공화제의 세속주의가 가톨릭 세력과 대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프랑스군이 패하여 1940년 6월의 휴전 조약으로 알자스·로렌은 독일 점령 지구가 되었고(법적으로는 프랑스령), 히틀러는 알자스를 바덴에 로렌을 자르프파르츠 관구로 합병하고 주민에게 근로 봉사, 방위 이외에 억압적 의무를 강요했다. 대전 뒤 알자스·로렌은 프랑스령으로 다시 편입되었고, 특히 알자스는 독일에 대해서는 프랑스와의 국민적 결합을, 프랑스에 대해서는 독특한 문화적 자율성을 나타냄으로써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중간적 위치를 획득했다.
출처 : 프랑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