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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함
누리함23.04.26

일본의 메이지 유신 개요와 역사, 조선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개요와 역사, 조선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조선도 세도 정치가 아니라, 먼저 근대화를 수용했더라면 아픈 역사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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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당시 일본은 분명한 명분, 방향성(탈아입구, 화혼양재[1]), 추진력을 지니고 개혁을 시도한 반면, 조선은 꽉 막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뒤늦게 크게 당하고서야 불리한 조건으로 개항을 시도한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보는 인식이 적지 않다.

    물론,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단순히 개방 시기의 차이만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무리이고, 다수의 요인들이 수백 년간 누적된 결과의 영향도 컸다. 일본은 남서방향으로 돌출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서구 세력과의 접촉이 조선보다 훨씬 빨랐으며, 따라서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도 당대의 조선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았다.[2] 당시 에도 막부의 수도였던 에도는 막부의 정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인구가 100만에 육박하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으며[3] 임진왜란 이후 발전한 도자기 생산 및 이와미 은광의 개발 등 상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획기적으로 번영하고 있었고 현대 일본의 중심권역인 간토 평야를 개간하면서 인구가 폭증했다. 물론 19세기까지는 공식적으로 나라의 문을 닫았으나, 어쨌든 네덜란드와 교류을 이어왔고(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를 설치해서 사실상 무역특구 조성) 그것도 단순히 몇몇 사치품을 들여오는 수준이 아니라 정밀한 인체골격도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가라쿠리 로봇을 만들었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난숙)를 설립했으며 나아가 도자기나 우키요에같은 일본의 문화예술이 유럽으로 건너가 자포네스크를 유행시켰다.

    조선은 그에 비하면 서양과의 직접적 교류는 아예 전무했고 조정은 외척에 의해 시달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사회적으론 빈곤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반란, 신분계층의 동요가 지속되어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의 사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일본은 이미 서구와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외교 경험을 쌓아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급동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일찍 문을 열었으면..."하고 아쉬워 하지만, 물론 분명 매우 늦은 근대화의 시기 또한 실패의 요인 중 하나인 것은 맞다. 그러나 수많은 실패 요인들과 악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냥 문 연다고 해서 근대화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문을 여는 순간 되돌아갈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대격변을 견뎌낼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4] 서구 열강이 각종 문물을 공짜로 베푸는 것도 전혀 아니다.[5] 당장 일본만 해도 19세기 당시 인구가 조선의 2배에 달하고 상공업의 발달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져 있었음에도 에조 공화국과 내전을 치르고 러일전쟁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구사일생하고 연이어 벌어지는 칼부림과 암살 등 내/외부적인 위기가 엄청나게 많았고, 결국 계속되는 위기 끝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한계에 도달해 몰락했다.[6] 조선보다 자체 여건이 훨씬 우수했던 일본도 근대화 과정에서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하다 겨우 성공했는데, 조선이 과연 문을 일찍 열었다고 해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 의문이다.[7] 즉, 개항을 얼마나 빨리 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개항을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했냐가 관건이다.

    한국인의 '일본은 빨리 개혁개방 했다'라는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일본은 원래 조선처럼 쇄국을 했고 흑선개항, 즉, 무력을 통해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한 것이다.[8]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이 시기에 대한 인식은 지나치게 구조적인 면을 무시하고 무슨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는 운좋은 시대의 로또를 맞은걸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동시대 조선인들에 대한 자학적 인식으로 이어지는데 이거야 말로 너무나도 역사의 구조적, 장기적인 요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애초에 정치적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화'는 무슨 동시대에서 한줌거리도 안되는, 막말로 요즘 세상으로 치면 마이너 취향 난학자 지식인 쪼가리들이 중심이 된게 아니다. 대서양 관계에 치중하는 것이야 말로 무슨 본인들을 아시아인이 아니라 피부만 누렇고 눈만 좀 째진 유럽인들로 보고싶어하던 1980년대 버블경제 시절의 일본인들의 탈아입구적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당장 조슈, 사쓰마 양대 웅번 중심으로 존황양이란 호소력 있는 반체제 이데올로기를 가공하고 퍼뜨려서 토막 혁명을 이룩하고 근대국가를 설립한건 17세기 임진왜란기 조선 유학자 포로들에서부터 시작한 일본 성리학의 자체적인 발전에 따른 지극히 동양적인 문명 교류 덕분에 생긴 결과였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선 체제유지와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던 성리학이 일본에선 왜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됐는지는 사무라이가 만들었으면서 막상 그 사무라이는 지극히 살기 팍팍한 시대, 성리학에 대한 열망은 높은데 이미 지방 유림과 서원 중심으로 사대부 사회가 발전한 조중과 달리 막상 직업으로 이를 다룰 기회는 막부의 관학자 밖에 없어서 세상에 불만이 많은 (쁘라스 여긴 일본이라 칼도 다룰줄 아는) 재야 유생들이 쏟아졌다는 에도 시대 자체의 시대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성리학이 자리잡은 사회라도 조선 같으면 정적인 사회구조와 맞물려 한국에선 오히려 200년 지난 지금까지 유교가 한국을 망쳤다니 이런 소리가 나오게 하는 반면, 막상 그 시대에선 구경온 조선통신사들이나, 일본 유학자들 본인들이나 비분강개하던 일본에선 아무리 경전 잘 외워도 잘해봐야 관에 쫒기는 동네 서당 훈장밖에 못한다는 모순적인 사회적 현실이 오히려 성리학을 폭발적인 혁명 이데올로기로 키웠던 것이다.

    이렇게 진지한 역사학적 주제로 일본 메이지 유신의 성공 비결을 파고 들자면 고려해야 하는 역사적 조건이 너무나도 많다. 당장 동시대 산업화 초기 서양 강대국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던 에도 시대 일본의 자체적인 상업적, 경제적 발전상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막부 말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본적인 물질적 인프라는 탄력적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내제화하는 과정과, 막상 무진전쟁 이전에도 기본적인 근대화에 대한 필요성 자체는 토막, 좌막 세력을 넘어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던 당대 정치 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며,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어떻게 일반적인 관점에선 일본이란 나라 안에서도 가장 촌구석에 쩌리였던 조슈, 사쓰마 지방 세력이 혁명의 주역이 되었는지 이런 세밀한 과정을 알기 위해선 골치아프고 복잡한 근대 이전 전국시대부터 이어진 일본 봉건제 특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필요하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 시기 일본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이 이런 굉장히 핵심적이고 중요한 일본 내부적인 역사적 요소, 구조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나 이해는 하나도 없이 마치 메이지 유신을 일시적인 로또로 취급하고 "우리 조상은 왜 따라하지 못했을까?" 자문하고 있는 상당히 비생산적이고 몰역사적인 자학적 사고방식에 기반해 있다.
    출처: 나무위키 메이지유신/조선과 일본의 차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