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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06.17

족보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유래가 알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전해 오는 족보가 뚜렷하게 있잖아요. 외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런 족보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유래가 알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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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족보는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인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 시초는 중국으로, 제왕연표라는 황족의 혈통 계보 책에서 비롯되었으며 개인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때 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에서 응시생의 가족 내력을 확인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제계(帝系)》라는 제목으로 황실의 계통을 밝히는 제왕연표(帝王年表)를 기술한 데서 비롯하였으며, 개인이 보첩을 갖게 된 때는 한나라 때 관직 등용을 위한 현량과에서 응시생의 내력과 그 선대의 업적 등을 기록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한나라가 망한 뒤 문벌의 전성 시기를 맞이한 5호 16국 시대에 이르러 가계가 존중되고, 조정에서 모든 집안의 보첩을 수집하여 심사한 뒤 등급을 매겨 구분하고 명문 집안이 아니면 고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지면서 계보에 대한 기록 작성 및 계보의 신빙성을 검증하는 학문인 보학(譜學)이 발달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처음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 (18대,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족보의 유래

    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가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왕대실록」이니 「원록( 源錄)」이니하여 왕실의 계통 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각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이를 명백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한나라 시대부터 이것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 것 같다. 여러 가지 문헌에 의하면, 후한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우족(右族)·관족(冠族)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중요시하는 사상이 높아져서, 이때부터 족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문벌의 전성기인 위(魏)·진(晉)·남북조(南北朝)에 있어서는 제가의 족보를 수집 심사한 뒤에 이것을 갑을의 문벌로 구분하여 세족이 아닐 경우에는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隨)·당(唐) 에 이르러서는 문벌을 가리지 않고 학력과 인물을 주로 하는 과거제도가 행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천거(薦擧)의 표준으로서 문벌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들어가면서 이제까지 관에서 정한 공적 성격을띤 족보가 사적인 성격으로 변해 이때부터 족보의 기능의 관리선발의 추천 자료가 됐고, 동족의 「수족(收族)」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송대 이후의 족보는 곧 이와같은 기능을 중심으로 민간에 널리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시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려 사회는 문벌귀족의 형성으로 족보가 유행하였고, 신분에 따라 사회활동및 출세의 제한은 말할것도 없고, 문벌이 낮은 가문과는 혼인조차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식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족보의 편성, 간행을 촉진시킨 그 당시 사회의 특수한 배경과 성격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고려 시대의 권문귀족(權門貴族)에 있어서는 이른바 족보의 체제를 구비한 세계(世系)·행렬(行列)의 방식을 취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계도(系圖)에 의하면 같은 항렬에 있는 여러 인물이 같은 자근(字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당시 이미 계보에 관한 관념이 일반화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문종(文宗)때에는 성씨·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부책(簿冊)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 관계를 밝혔으며, 더구나 그 당시는 족보의 유행이 한창이던 송(宋)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던 시대여서 족보의 유행은 하나의 필연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당시에는 출판 사정이 쉽지 않앗기 때문에 필사(筆寫)에 의해 족보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초(國初) 부터 족보의 편성간행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 자신이 벌족 정치의 국가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敎)를 국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성족(姓族)파별로 가승(家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생겨 족보가 없는 집안은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였고, 그 체제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당시는 원시적 부족사회의 형태와 같은 동족의 집단부락이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붕당학파(朋黨學派)의 싸움이 치열하여 배타적 관념으로 인해 자연 동당(同黨)· 동파(同派)·동족(同族)의 일치 단결을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왕실의 계보록이 중요시되어≪ 원계보( 源系譜) ≫와 ≪종실보첩(宗室譜牒)≫이 그후 여러 차례 수보(修補)되었으며, 귀족·권문에서도 수보 의 기운이 싹트게되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어느 성씨의 족보가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한마디로 단언하기가 매우 어려 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최초에 간행된 족보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의족보라 알려지고 있다. 이 문화유씨 족보는 1522~1566(중종 16~명종 21) 가정년간(嘉靖年間)에 나왔기 때문에 이를 흔히 ≪ 가정보(嘉靖譜)≫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온 족보 가운데 문헌적으로 오래된 것으로서 신뢰할만한 것은 안동권씨의 ≪ 성화보(成化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 성화보(成譜)≫는 성종(1476)때인 명나라 헌종 성화 12년에 간행된 것으로, 문화유씨의≪ 가정보(嘉靖譜)≫보다 약86년 앞선 셈이다.

    안동권씨측의 말에 의하면 안동권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흔히 「사시(四始)」라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을 첫째로 꼽고있다. 그런데 문화유씨 ≪ 가정보(嘉靖譜)≫서문 가운데는 가정보다 140년 전이 되는 명나라 영락년간(永樂年間)-세종5년 계묘(癸卯)에 이미 문화유씨보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영락 보≫가 과연 간행본인지 혹은 필사에 그치는 정도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여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족보는 당시 계급사회의 산물로 안동권씨보·문화유씨보 등이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라 할 수밖에없다. 이와 같은 명족의 족보출현이 다른 문중에서 족보를 만드는데 모형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고, 이러한 족보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필사에 의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족보 보다는 가첩이나 가승이 오히려 많았을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 후 족보는 임진왜란이란 미중유의 전란 때문에 많은 문헌들과 함께 소실되었고, 숙종 이후에야 다시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 다. 그 당시의 소위 양반들은 특권층으로 대개 지주들이었는데, 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직을 강화햐야만 했다. 예컨대 서원(書院)·향약(鄕約)·향청(鄕廳)·두레계(契)·족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등 사회적인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기도하며, 뇌물을 써 가면서 족보에 끼려고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일제치하에 있어서는 이민족의 지배 때문에 학문이나 일반 사회문제의 연구보다도 관심이 동족결합에 쏠리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년 발행되는 각종 출판물 중 족보발행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경제를 배우고, 문예를 즐기고, 사상을 연마하는 것보다 일문일가의 기록을 존중하는 것을 훨씬 더 중대하게 여겼음을 알수 있다. 즉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취락」후편에 의하면, 그 당시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인 발행의 단행본· 출판허가 건수는 1933년에는 861건, 1934년에는 1,090건이었는데, 족보의 발행 건수가 1932년에 137건, 1933년에는 151건에 달하여 한국인 간행의 출판물 중 족보의 발행이 항상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10개년간(1823~1932)의 족보 발행 회수를 각 본관 성씨별로 따져 본다면, 일족 이 가장 번영한 김해김씨는 112회, 연평균 12.5회로서 수위를 차지하며, 밀양박씨가 88회, 경주김씨가 69회, 전주이씨가68회, 경주 이씨가 55회, 호산신씨가 42회, 광산김씨가 38회, 안동권씨가 34회, 수원백씨가 27회의 순위로 되어 있다. 족보는 인쇄에 의한 간행 이외에도 필사 또는 등사본(謄寫本) 등의 유포가 적지 않았을 것을 고려할 때, 당시 얼마나 족보 발행이 성행 했던가를짐작 할 수 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같은 씨족(동족)의 시조로부터 족보 편찬 당시 자손까지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씨족(동족)이란 성(姓)과 본관(本貫)이 같아서 동조의식(同祖意識)을 가진 남계친족(男系親族)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여러 족보에는 씨족(氏族)·본종(本宗)·종족(宗族)·종(宗)으로 나타나 있다.


    족보는 동족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역사이기 때문에 족보를 통하여 종적으로는 시조로부터 현재의 동족원까지의 세계와 관계를 알 수 있고, 횡적으로는 현재의 동족 및 상호의 혈연적 친소원근(親疎遠近)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가계(家系)의 영속과 씨족의 유대를 존중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족보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따라서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며, 씨족을 단결하고, 소목(昭穆: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을 분별하는 등 동족집단의 본질을 여실히 나타내준다. 족보는 이처럼 동족결합의 물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동족조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족보는 서양에서도 있었다고 하나 동양의 족보와 같은 것이라기보다 대체로 개인의 가계사(家系史)와 같은 것이다. 동양에서 족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족보가 등장하고 있다. 족보의 연원을 살핌에 있어 족보의 편성·간행을 촉진시킨 우리 나라 고유의 사회적 정세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두헌(金斗憲)은 “한국에 있어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현저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계급적 의식과 당파관념이 자못 치열해짐에 따라 문벌의 우열을 명백히 하려고 하였음에 기인한다.”고 말하였다.


    족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으로는 ①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③ 적서(嫡庶)의 구분, ④ 친소(親疏)의 구분, ⑤ 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시대의 묘지명 등의 사료에 의하면, 소규모의 필사(筆寫)된 계보는 이미 고려시대 이래로 귀족 사이에 작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으로 이때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 永樂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는 문화 유씨의 두번째 족보인 1562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 嘉靖譜≫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1476년 발간의 ≪안동권씨세보≫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임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조선 초기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 여흥 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成氏, 1493) 등의 족보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