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이 본격화된 것은 1940년 이후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사망한 친일파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선 귀족, 중추원 참의 등 고위 친일파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불이익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일본일들도 창씨개명을 하면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이 어렵다고 완강하게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총독부는 이들을 제외함으로써 자발적이라는 이미지를 선전하려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0년 5월까지 창씨 계출은 호수는 7.6%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면서 신고 마감까지 79%로 대폭 늘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