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초기, 왜 고려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이성계가 정권을 잡아 고려를 멸망 시키고, 조선을 세웠는데요
그 뒤에 바로 정치제도 및 관련 제도를 다 바꾸지 않고, 고려의 제도를 지속적으로 사용했다고 했는데 왜그랬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라가 바뀌었을 때 초기에는 급작스런 변화에 국정 운영이 혼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기틀은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조선 초기에 고려의 정치 및 행정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간 것도 있고, 폐지하거나 변경한 것도 있습니다.
고려 말에 들어서는 전반적인 관료 조직의 형태가 중앙집권 체제로 많이 자리 잡아 있었던, 중국의 관료 조직을 수용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왕권 확립을 위하여 관료 조직은 그대로 가지고 가되 그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등에 제제를 가하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져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 때는 왕권을 약화하고, 재상 즉 고위 관리들(성리학자)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가 있었습니다. 신진사대부로 조선건국 주축이었던 정도전이 불씨잡변이라는 책도 썼었으며, 행정, 문화, 사회 전반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경국전이 편찬되었습니다. 이후 이 조선경국전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을 죽이고,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사병을 없애 고위 관리, 권문세족들의 역성 혁명 위협으로부터 왕권을 보호하여 군은 국가만이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의정부 6조직계제 시스템을 가지고 갔고, 지방은 8도 체제를 정립시키고 고려 시대와는 달리 모든 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8도에는 관찰사를, 부, 목, 군, 현에는 수령과 향리를 파견하였습니다. 고려의 향리는 권력이 있었으나, 조선의 향리는 권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 단순 공무원이었습니다.
성리학자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림은 유향소(여론형성), 서원(인재양성), 향약(농민관리)을 통해서 지방의 권력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중앙 정부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이 경재소를 만들어 유향소를 감시하였습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인재등용에 있어서 천거와 문음(음서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위관직에는 불가능하게 제도를 개선하였고,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오를 수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로 나누어 실시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무과는 없었으나 신설되었고, 불교국가라 승과를 시행하던 고려와는 달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 시대에는 승과를 폐지하였습니다.
이후 왕의 성향에 따라 중앙집권을 느슨하게 했다가 조였다가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시대는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주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정치가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갑작스러운 변화보다 평화로운 점진적 정치를 꽤했기때문으로 보입니더
안녕하세요. 노인옥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후 곧바로 정치제도 및 관련 제도를 개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려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고려의 국호와 국기를 유지했으며 고려의 관직과 법률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이렇게 고려의 유산을 계승하고자 했으며 자신이 고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고려의 기존 관료들을 대부분 채용하고 새로운 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해 시험을 실시했습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단 이성계가 고려와 왕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애착도 있었고 익숙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정통성을 이어가고자한 부분이 큽니다. 본인이 왕이된 정당성에도 포함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건국초기라서 사회적으로도 혼란이 많았는데, 일단 기존 제도를 유지하면서 정비하려는 측면도 있었고, 빨리 세로운 체계를 만들기에는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새 나라가 된만큼 주위 나라와의 관계도 바로 신경써야하고 몽골과는 싸우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