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미군정은 민심 수습을 위해 이승만을 활용했습니다. 이는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친미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직후 신탁 통치 문제를 놓고 반탁 운동을 전개하여 미국의 입장과 달랐습니다.
이에 미군정은 미국 시민권자이자 개화, 독립 운동의 상징이자 미군정의 입장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미국에 체류중인 서재필을 이승만 대안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어에 서툴고, 노화로 대중적 인지도가 생각보다 크지 않아 이승만의 입지가 더 굳어져 실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