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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06.03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잘 알고 있고 학교 다닐 때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러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3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파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 진출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주변인들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런 '대륙 진출'이라는 이름의 침략 야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이미 여러 번 언급했다.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노부나가의 유력 가신인 히데요시가 충분히 영향을 받을 만 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도주 소 씨(宗氏)[53]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또한 불응할 경우에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 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에 일본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54]

    이렇게 도요토미의 첫 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조선에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이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 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한 그는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쓰시마 도주로서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하면서 바닷길이 험하다면 자신들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과 도요토미 정권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군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보내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쓰시마는 이를 확답으로 만들기 위해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하는 노력을 보였고,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과 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55],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56]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57]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동산도[58] 원정으로 출정하여[59]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아온 뒤에도 궁을 수리한다는 구실로 국서를 받지 않았다. 결국 11월 7일에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는데, 그리고 이 회견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회견장에서 자신의 아들인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안고 데리고 오는 무례를 범했다. 아래 영상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기가 오줌도 지렸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임진왜란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천하통일하는 과정에서 여러 파벌들끼리의 싸움으로 내부가 혼란스럽자 이를 외부로 돌리고자 대국을 정벌하고자 하였고 대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선을 먼저 친다는 정명가도(정한론)를 주장하면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5만-10만의 명나라 군사들이 죽고 조선도 83만-100만명이나 희생된 전쟁이었습니다. 일본도 13만-30만명이 죽은 전쟁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고 우선 조선을 치고 그 길로 명나라 까지도 정복 하고자 임진 왜란을 일으크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치러간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는 사무라이층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시작해습니다. 정명가도 즉 명나라 정벌을 가는데 조선이 길을 빌려주라고 요구했고 조선은이를 거부한 셈인데 이순신의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활동, 명군의 지원으로 큰 피해는 있었지만 결국에 막아낸것입니다.


  • 임진왜란(1592-1598)은 16세기 말에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장르를 거쳐 중국 무역에 참여하려는 목적과 동시에 국내의 사회·경제적 불안을 외적 확장으로 해결하려는 목표로 인해 발생한 전쟁입니다. 이는 일본과 조선, 그리고 중국 명나라 사이에서 일어난 큰 국제 전쟁이며, 국제관계의 변화와 군사기술의 발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불안정한 내부 상황을 안정화시키고, 국력을 늘리기 위한 방안으로 외적 확장을 선택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 새로운 전투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국내의 병력과 무기를 소모시킴으로써 군사적 위협을 감소시키려 했습니다.

    더불어, 일본은 명나라와의 직접적인 무역을 원했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일본을 '왜'라고 부르며 '반반일'이라는 비하의 의미를 담아 일본과의 외교적인 교류를 기피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를 극복하고자 명나라를 통한 중국 무역을 추진했으나, 이에 명나라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조선을 거치거나 제어하여 명나라와의 무역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1592년에 일본은 조선을 공격하게 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와 신규 군사 기술의 도입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은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한반도를 통해 중국을 공략하려는 목표와 일본 내부의 사회·정치·경제적 불안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불법적인 침략 전쟁입니다.

    당시 조선은 평화롭게 중국 명나라와 수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과도 일정 수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통고적인 국제법을 무시하고 한반도를 무단으로 침략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제사회의 법질서를 심각하게 침해한 행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6년 동안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무단 침략으로 인한 결과로, 사람들의 생명과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국제사회의 원칙에 반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임진왜란은 일본의 불법 침략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