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조선 관군은 잘 싸웠나요?
우금치 전투 당시 일본군이 500명, 조선 관군은 1500명,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정확한 통계를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책에서는 일본군이 승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는 하지만 조선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같은 나라 백성이고 일본군에 비해 관군이 훈련도가 떨어졌을 때니 전투수행을 잘 하였는지 아니면 전투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는지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관군은 동학농민군과 같은 나라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전투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관군은 일본군에 비해 훈련도가 떨어졌으며, 무기의 성능도 좋지 않았습니다.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근대식 무기와 잘 훈련된 군사력에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전투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관군은 훈련도가 일본군에 비해 떨어지고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같은 나라 백성이었기 때문에 전투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금치 전투에서도 조선 관군은 제대로 싸우지 않고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에 일본군은 최신 무기와 전략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동학농민군을 대파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 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입니다. 1894년 9월 재봉기 이후 동학 남접의 접주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가 함께 공주를 공격하기로 정하였습니다. 10월에 이인 효포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농민군이 대패하였고 농민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11월 초에 우금치를 주공격로로 협공을 펼쳤으나 조선 일본 연합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전봉준은 계속된 패배에 농민군을 해산하였고 그해 12월 배신자의 밀고로 전북 순창에서 체포되어 압송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