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100시간이 전쟁이 무엇인가요?
100시간전쟁이라고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전쟁이 있더군요.
흔히 축구 때문에 벌어졌다고 하는데 단순히 축구는 아닌것 같은데 구체적인 배경과 왜 축구로 인해서 결국 발발한건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1970년 월드컵 북중미 예선 준결승전이 계기가 되어 100시간 동안 벌였던 전쟁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9년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100시간 동안 벌인 전쟁으로 1970년 월드컵 북중미 예선 준결승전이 계기 되어 일어났습니다.
축구가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라 할수 없지만 두 나라 간에 쌓였던 악감정이 터지는 기폭제가 축구였습니다.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에 비해 면적이 1/5에 불과했지만 인구는 언제나 더 많아 인구과잉 문제로 골치를 앓았고 사실 단순히 땅이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엘살바도르 내에서 농지로 쓸 만한 땅을 이른바 14가문을 비롯한 극소수 부유층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일반 중소농들이 일굴 수 있는 땅이 적었습니다. 당시 엘살바도르 독재 정권은 이들 특권층과 유착관계가 깊어 토지 독점을 딱히 해결하지 않았고 당시 급속히진행되던 산업화로 인구과잉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상당수 엘살바도르인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땅이 널널한 온두라스로 이주, 20세기 초 온두라스는 땅이 크지만 노동력은 부족했으므로 이민을 환영했고 미개척지를 개발할 경우 토지도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1969년 온두라스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인 이민자는 30~50만에 당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온두라스 정부는 엘살바도르인에게 적대적으로 변했고 엘살바도르인이 온두라스로 대거 이주하면서 현지인과 밎는 갈들이 자연히 많아졌고 온두라스의 인구 증가와 농업기술 발달, 목초지 및 면화 농장의 확대로 인해 이들 이주 노동자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엘살바도르 공산품의 온두라스 시장 유입, 기후로 인한 국경선 확정 문제로 충돌이 잦았습니다.
결국 온두라스에서 1962년 새로운 토지개혁법을 발표, 1967년 발효하는데 이 법은 엘살바도르 이주민들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토지를 환수하여 자국 빈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내용이었고 이는 당시 중남미에서 수십년동안 토지개혁이 화두로 나오던 상황에서 엘살바도르인의 토지를 자국 내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주며 온두라스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나눠주지 않고도 충분히 달랠수 있다는 계산으로 통과된 법안이었습니다.
온두라스 대지주와 대기업들이 주도한 이 토지개혁에 의해 수천 명의 엘살바도르 노동자들이 추방, 엘살바도르가 이에 강하게 항의하며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됩니다.
1970년 월드컵 예선전이 벌어지자 관중들 간의 충돌에 각종 방해공작이 판을 쳤는데 온두라스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온두라스 시민들이 엘살바도르 선수단 숙고 바로 옆에서 밤새도록 급조한 축제를 벌였고 반대로 엘살바도르 홈 경기 2차전에선 엘살바도르 국민들이 돌과 썩은 달걀, 죽은 쥐를 숙소 창문에 집어던지거나 호텔 요리사가 대량의 설사약과 수면제를 넣은 요리를 경기날 아침 온두라스 선수들에게 제공, 엘살바도르 홈 경기장에 온두라스 국기 대신 더러운 천을 온두라스 국기라며 걸어놓기도 합니다.
이런 방해공작에서 1차전은 온두라스가 1:0으로, 2차전은 엘살바도르가 3:0으로 승리를 나눠가지면서 1:1이 됩니다.
당시 골득실이나 원정 다득점 같은 개념이 없어 1:0으로 이기나 10:0으로 이기나 같은 결과였는데 , 이것만 잘 처리했다면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 하지만 골득실이나 원정 다득점 같은 복잡한 룰이 만들어진 계기가 바로 이 사건입니다.
축구 때문에 시작된 전쟁은 아니었으며 축구는 기폭제 및 침공 명분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1차전이 온두라스의 승리로 끝나자 엘살바도르의 한 열혈 축구팬 소녀가 패배의 충격으로 권총자살하는 사건이 발생, 18살의 라멜리아 볼라뇨스라는 이 소녀는 경기 막판에 온두라스 선수 로베르토 카르도나가 골을 넣어 승리를 가져가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그 길로 책상에 있는 아빠 권총으로 자살, 엘살바도르에서는 이 소녀를 국가적으로 추모, 방송으로 생중계된 이 소녀의 장례식에 엘살바도르 축구대표 팀, 군 의장대, 엘살바도르 대통령까지 참석,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달아오른 국민 감정을 더 부추기게 됩니다.
결국 유혈사태를 우려한 피파가 3차전을 제 3국인 멕시코에서 열었고 멕시코는 경기 중 일어날 수 있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10만명이 입장할수있는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에 2만명만 입장시켰고 경찰이 관객보다 많았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이기면 외교단절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지경이었고 6월 27일 벌어진 3차전은 연장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합니다.
온두라스 국민들은 자국 국가대표침이 패하자 반 엘살바도르 감정이 폭발,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린치를 벌였고 이 사태를 구실로 엘살바도르는 7월 14일 민간 여객기에 폭탄을 장착해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의 공군기지를 기습 선제공습하며 경국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원래 사이가 안 좋았는데 1970년 월드컵 북중미 예선 준결승전 유혈사태를 우려한 FIFA가 3차전을 제3국인 멕시코에서 열었는데 멕시코는 경기 중 일어날 수 있는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10만 명이 입장할 수 있는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에 2만 명만 입장시켰으며, 그마저도 관객보다 경찰이 많았을 지경인데 이런 FIFA의 노력에도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이기면 외교 단절을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고 합니다. 6월 27일에 벌어진 3차전의 결과는 연장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했고 온두라스 국민들은 자국 국가대표팀이 패하자 반 엘살바도르 감정이 폭발하여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 했고 이 사태를 구실로 엘살바도르는 7월14일 민간 여객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온두라스 수도 테구 시갈파의 공군기지를 기습 선제공습하며 결국 전쟁이 개시되었는데 이민자 문제, 경제 문제, 정치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곪아왔던 두 나라 간 적개심이 축구를 계기로 폭발한 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