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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4.04.03

모자관계인 인목대비와 광해군은 왜 사이가 안좋았나요?

조선시대 왕실에서 모자관계였던 인목대비와 광해군은 어째서 서로를 폐위시키려고 하고, 역모를 꾸미는 등 왜 사이가 안좋았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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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32살 차이나는 계비로 영창대군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이 9살이 많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공빈김씨의 아들로 태어나 적자가 광해군은 왕위 계승 문제 있어서 영창대군과 인목대군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광해군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1613년 계축옥사라는 사건을 통해 영창대군과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목대비는 폐비되고, 친정아버지와 영차대군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인문·예술 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그 이유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인목대비의 아들이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 이의를 죽였기 때문이며, 실제로 이 사건으로 인해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관계는 멀어졌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킴에 따라 사실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몽진을 떠나면서 조정을 둘로 나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조정을 맡기자 광해군은 분조를 맡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를 돌아다니며 군을 다독이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였습니다. 또 전란이 끝난 뒤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을 정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그런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앉히고자 했으나 북인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였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폐서인 시켜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