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배경과 결과가 어떻게 되나요?
평안북도에서 홍경래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농민항쟁인 홍경래의난이 거의 10년의 준비끝에 터져버린 난이라고 하는데 왜 일어난건지 배경과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고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 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중앙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 되었고 지역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정주성에서 농성을 시작한지 100여일, 거병한지 5개월만에 막을 내립니다. 전투가 끝난 뒤 정주성에는 모두 2983명의 사람들이 살아 남았는데 관군은 이들 중 여자 842명과 10세 이하 어린이 224명만을 석방하고 나머지 1917명은 즉결처형했습니다. 이후 홍경래의 이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반란주모자들 중에는 스스로를 홍경래라 자처하거나 "홍경래는 죽지 않았다."며 민중을 현혹시키는 자들도 나타납니다. 이렇듯 홍경래가 죽은 후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생활고와 지방 차별에 대한 억울함에서 오는 위정자에 대한 전 민중의 반항을 대변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요약 1811년 평안북도에서 홍경래가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으로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 대우와 지나친 세금, 탐관오리의 수탈을 견디다 못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염민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당시 지방에대한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난입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위와같은 차별과 부패가 만연하였고 농민들은 그 부정한 행동들에 분노가 쌓여가던중이였습니다.
결국 이는 진압되었지만 정부에 저항하였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지방 여기저기서 일어난 농민봉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