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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4.05

홍경래의 난은 왜 일어났는지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것으로 아는데 왜 홍경래라는 사람이 정부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전쟁의 전개와 결말은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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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5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평안도 사람들은 억울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이 지역은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많은 양의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지역 경제가 발달한 덕에 화폐가 널리 사용되고 상공업 세력까지 성장해 서민 의식이 일찍부터 싹튼 곳이라 불합리한 현실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한술 더 떠 정부는 평안도 사람들을 차별하기까지 해 그 분노는 더욱 심했다.

    평안도에 살던 몰락한 양반 홍경래는 세도 정치 속에서 이중 삼중으로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양반들과 평안도 지방의 차별에 반대하며 대규모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경래의 난 (한국사 개념사전, 2015. 02. 24., 최인수, 공미라, 김수옥, 김애경, 김지수, 노정희)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평안도 사람들은 억울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이 지역은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많은 양의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지역 경제가 발달한 덕에 화폐가 널리 사용되고 상공업 세력까지 성장해 서민 의식이 일찍부터 싹튼 곳이라 불합리한 현실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한술 더 떠 정부는 평안도 사람들을 차별하기까지 해 그 분노는 더욱 심했다.

    평안도에 살던 몰락한 양반 홍경래는 세도 정치 속에서 이중 삼중으로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양반들과 평안도 지방의 차별에 반대하며 대규모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빠르게 퍼져 나가는 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몰락한 양반과 상공업 세력은 물론 농민들, 품팔이꾼까지 정부에 반대하며 난에 참여했고, 열흘 만에 평안북도 대부분을 장악해 버렸다. 그러나 홍경래의 힘은 여기까지였다.

    홍경래는 모인 사람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열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야 했지만 아직 유교적 사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할 수 없었다.

    결국 지도부는 삼정의 문란을 대신할 개혁안을 제시하지 못해 힘을 잃었고, 대대적인 정부군의 공격으로 정주성에서 관군에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후 다른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 한국사 개념사전


  • 1811년(순조 11)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입니다.

    홍경래는 죽었지만 여전히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살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란의 원인으로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고, 지역 차별과

    권력이 소수가문에 집중되면서 백성들이 수탈당하는 정도가 커지게 되면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납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빚을 내서 관직을 사고,

    관직에 오른 다름에 더 높은 관직에 올라가려면 또 돈이 필요하니까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악순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백성들의 수탈에 매관매직까지 악순환의 고리들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경래는 평안도 지방 사람입니다.

    당시 평안도는 다른 지역보다

    차별이 심했지요.

    홍경래도 차별에 원한을

    품은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결국엔 농민들을 모아서

    평안도 지역의 차별을 없애라고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몇십일 만에 실패되고

    홍경래와 그의 일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처형당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평안도는 중국과 접경한 곳으로 명, 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정기적으로 운영되는 무역과 잠상에 의한 밀무역도 성행했는데 이는 산간 지대가 많고 평야가 적어 농업에 불리한 평안도에 상공업이 발전하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아울러 평안도 각지에서 은광과 금광이 발견되고 교역에 필요한 은과 금이 채굴되면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곳에 새로운 사회층이 형성되었습니다.

    측히 중국과의교역, 광산의 채굴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민은 신향을 구성하여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으나 기존에 지역 사회를 장악하던 원향과 대립하여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신향은 도리어 지방관의 수탈 대상이 됩니다.

    평안도느 조선 전기에 개척되었고 이주를 통한 인구의 충원으로 유력한 가문이 적었는데 특히 죄를 지은 자의 집안을 평안도에 유배하면서 이들이 가문을 형성한 사례가 많았고 이런 상황은 평안도에 대한 정치적 차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평안도 출신 응시자의 과거 합격률이 적지 않음에도 평안도인은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게 됩니다.

    즉,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는 평안도 신향에 대한 억압과 평안도에 대한 정치적 차별은 지역 사회의 불만을 야기했고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전열을 정비한 안주의 관군과 12월 29일 박천 송림에서 격돌하나 패했고 정주성으로 퇴각해 전략상 수세에 몰리게 되며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 역설하여 정주성에는 관군의 노략질을 두려워 한 박천, 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습니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 허항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에서 패전함으로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갑니다.

    한겨울 정주성으로 쫓겨간 봉기군은 매우 열악한 상황으로 식량이 떨어져 죽는 이가 속출하고 그후 정주성의 종기군은 한성에서 파견한 순무영군사와 지방에서 동원된 관군의 연합 부대에 맞서 전투를 계속하면서 오랫동안 성을 지켰으나 땅굴을 파들어가 성을 파괴한 관군에 의해 1812년 4월 19일 진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에 조선시대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홍경래는 순조 16년(1806년)에 지방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그의 성격이 고집스러워져 지방 관청에서 재임 중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홍경래는 지방 관청에서의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해 개혁을 요구하면서 충청도 선비들과 연합하여 정부에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홍경래는 1811년 1월에 전국적으로 무장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연합한 선비와 지방 관리들도 함께 반란에 참여하였습니다. 반란은 서울과 전국에 퍼져 전국 13도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홍경래는 반란 선언문에서 현실적인 개혁과 지방분권을 요구했으며, 국왕에 대한 충성도를 유지하면서도 권력을 지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반란은 군사적으로는 약해, 결국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홍경래는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으며, 선비와 지방 관리들도 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 순교하게 됩니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시대의 농민과 선비들, 지방 관리들의 불만과 반향이 반영된 사건으로, 조선시대의 정치적인 상황과 권력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