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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4.01.30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님은 어째서 일본 총독의 양아들이 된건가요?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죽이고 체포돼 결국 사형을 당하셨는데요. 그의 남겨진 가족 중 아들인 안준생님이 일본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로 들어갔다는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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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 안준생은 1930년대 후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 총독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안준생은 아버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인해 가족들이 겪게 된 고통을 덜어내고자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중근의사의 아들인 안준생은 임시정부가 떠나버린 상해 길거리에서 구걸도 하며 비참한 나날을 보내다가

    미나미 총독의 꾀임에 넘어가서 양아들이 된듯 합니다.

    1951년 안준생은 부산에서 폐결핵을 앓다가 사망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중근 선생의 둘째 아들 안준생은 상하이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약국을 경영하며 근근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1939년에 상하이에 거주하던 친일파이자 상하이 조선인회 회장이었던 이갑녕을 단장으로 하여 '재상하이 만선시찰단'이 조선총독부의 초청 형식으로 조선을 방문하는데 여기에 안준생과 황일청(안중근의 딸 안현생의 남편)이 포함되어 있었고 만선시찰단 전원은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와 면담한 뒤 안준생을 제외하고 모두 되돌아간다.고 합니다. 홀로 남은 안준생은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지와 다쓰오, 촉탁(통역) 아이바 기요시, 안중근 의사 재판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소노키 스에키와 함께 박문사를 방문하여 '이토의 명복'을 빌게 되느데 다음 날에는 이토의 아들인 이토 분키치와 만나 다시 박문사를 공동참배하며 일제의 내선일체 선전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이에 공분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해방 후 귀국길에 중국 관리에게 변절자 안준생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준생은 형은 어릴때 중독사고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뭐, 아시다 시피 죽을 각오한 사람이라서

    소년가장이 따로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얼빈의거 다음엔 진짜 소년가장이고

    물론 임시정부에선 유족을 최대한 지원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사망에 뚜껑이 열린 일본이 철저 수색을 시작해서 급하게 떠날 수 밖에 없었어요

    일본군은 결국 버림받은 유족 안준생을 찾아버렸고 그를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그 결과 안준생은 서른이 넘도록 구걸로 먹고사는 경력도 없는 막장인생이 되었지요.

    이 상태에서 그의 인생을 구해준 사람이 당시 총독 미나미 지로 였던 거에요.

    물론 프로파간다용이란걸 안중생도 모르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평생 구걸해야 하는 인생의 유일한 탈출구가 친일이라면...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협박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친일행적이란 말도 있을 정도니...

    어쨌든 안준생의 행적을 본 일본은 감시를 느슨하게 해줬고, 덕분에 다른 가족들도 나름 잘 살수 있었습니다.

    안중생은 광복 이후론 처참하게 숨어 살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만

    그 와중에도 가족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민족에겐 배신자 였을 지 몰라도, 가족들에겐 희생자였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