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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7.28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당시의 진행과정이 궁금합니다.

조선 초기 세조때 함경북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 사건을 두고 이시애의 난이라고 한다는데요.


이 당시 반란의 배경과 진행과정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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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시애의 난의 배경과 전개,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호족 토반(土班)이었습니다.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원래 함길도는 조선의 왕실 발상지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여진세력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왕권을 장악한 세조는 중앙집권 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집권책은 북도인의 불만을 샀습니다.

    허유례는 그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서 길주권관으로 있음을 알고 거짓 항복하는 체 경성 운위원(雲委院)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이시애의 수하인 이주· 이운로 · 황생 등을 설득해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시애는 8월 12일 구성군 준에 의해 참형에 처해져 효수되었으며, 이로써 약 4개월에 걸친 난은 끝이 났습니다.

    이시애는 세조의 강력한 집권체제 확립에 대한 지방민의 불만을 대변하는 것같이 해 그들을 단결시키고, 자신이 일으킨 난을 의거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등 세조의 집권책에 반발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난이 진정됨에 따라 세조의 집권책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으로 대체,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회령부사를 지내다 상을 당해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 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 아우 시합,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음모하고 1467년 5월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는 함길도의 절도사가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 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등을 죽이고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 하는 등 함길도는 혼란스러워 집니다.

    또 그는 중앙에서도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서울의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해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 모략전술을 폈고 세조는 이에 속아 신숙주 등을 투옥했다가 곧 귀성군 준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킵니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나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는 홍원, 북청을 돌파하고 이원의 만령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당시 사옹별좌의 벼슬에 있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자기 부친이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운로 등을 설득해 이들과 함께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인계합니다.

    8월 이시애 등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고,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 , 함길도는 남,북 2 도로 분리되었으며 유향소도 폐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