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도에 등록박람회를 유치한 배경과 당시 필요한 예산이 어느정도였나요?
한국 91년도에 엑스포 등록박람회를 유치하려고 했다던데요.
그래서 당시 유치한 배경과 당시 필요한 예산이 어느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총 관람객수는 1,400만명을 기록하였으며, 투자비는 약 7,000억원이었습니다. 당시 정부 예산은 2,100억원이었으며, 수익사업을 통해 4,900억원을 조달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투입된 사업비는 총 7,535억원이었으며 국비 2,625억원, 지방비 2,625억원, 자체수익금 2,385억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전 엑스포와 같은 경우에는 정부와 민간이 합쳐 1조 8천억 원을 들였습니다.
대전 엑스포와는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하면서 진행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9년 말의 어느날 상공부와 외교부에서 서기관 2명과 사무관 2명 등 모두 4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국제무역박람회기구(BIE) 사무총장 테드 앨런을 만나기 위해 영국 그래스고에 도착했습니다. 아무 준비도 계획도 없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1991년까지 엑스포를 유치하라는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BIE는 1987년 6월 총회에서 1993-2001년 간에 모든 종류의 박람회를 2회만 개최하고 개최 희망국은 1988년 11월 20일까지 신청해야 한다고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한국 정부의 대전 박람회 신청은 BIE결정을 뒤엎고 1회를 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방법을 찾던 사절단은 2001년 2회 박람회는 종합박람회고 전문박람회는 회원국의 동의만 얻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대한 경쟁심리가 작동하여 경제계의 모든 동력을 가동하여 회원국들을 설득하려 나섰고 여러 개최 예정지 중 대전 유성구쪽으로 확정되자 김종필 등이 적극적 유치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기업들도 선이 닿은 모든 루트를 통해 회원국들을 전방위로 포섭하는 작전을 통해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상공부에서 주관하는 엑스포 예산은 450억 0이 하나 빠졌나 할 정도로 적은 예산이었지만 기대했던 대전 엑스포는 회원국 43개국 중 38개국 참가에 전원 찬성으로 결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