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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6.21

쿠빌라이는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나요?

쿠빌라이가 몽골 세력중에서 나중에 가장 강력해진다고 하던데 실제 몽골 왕족으로서 쿠빌라이는 어떠한 인물이었나요?? 징기스칸과 비슷한 능력을가진 인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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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출생 1215년

    사망 1294년

    몽골제국 제5대 칸, 중국 원나라의 시조라고 합니다.

    출생, 사망 연도가 있는것으로 보아 실제 인물로 보여집니다.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1251년 형 몽케가 제4대 칸의 자리에 오르자 중국 방면의 대총독에 임명되었습니다.

    고비사막 남쪽의 금연천훗날의 상도개평부)을 근거지로 삼고 지금의 중국 윈난성에 있던 대리국을 멸망시켰으며,

    티베트와 베트남까지 공격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쿠빌라이 칸

    쿠빌라이 칸의 업적이 뭔가요?

    쿠빌라이의 뛰어난 통치감각은 인구 1만명의 작은 영지에서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는 당시 칸이었던 삼촌 우구데이에게서 중국 하북지방에 속하는 형주(荊州)에 조그만 땅을 하사받는다.

    쿠빌라이 가문은 우구데이 칸의 그늘에 가려 몽골제국을 이끌 가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칸의 지위를 차지하고자 처음부터 야망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형주의 1만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영역을 차근차근 넓혀갔다.

    기다림과 포용,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은 훗날 커다란 효과를 낳는다. 신위만사본(信爲萬事本·신용이 만사의 근본)이라는 말처럼 만백성의 신뢰를 얻고 난 뒤에는 어떤 장애도 쉽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 이는 현대의 정치나 경영에서 그대로 유효하다.

    쿠빌라이 칸은 자신과 다른 민족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았다. 통치에 도움이 된다면 출신과 무관하게 참모로 적극 기용했다. 그 결과 쿠빌라이 정부에는 몽골인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인, 중국인, 위구르인, 티베트인 등 온갖 민족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와 함께 신하의 의견을 적극 청취하는 열린 소통 시스템을 마련한다. 참모들에게 정책 제안서를 올리도록 하되 설사 채택되지 않거나 귀에 거슬릴지라도 처벌하지 않았다. 13세기에 이미 민족, 종교, 지역을 뛰어넘는 포용과 통합의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

    이처럼 차별 없는 정책기조는 역대 최고의 경제부흥의 원동력이 됐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전통 유교사상을 존중하면서도 상인과 무역, 장인과 의사 등 실용적 분야의 인재들을 등한시한 중국과 달리 이들의 가치를 높이 샀다. 이에 따라 각계각층이 차이와 차별을 뛰어넘어 통합됨으로써 더 큰 이익이 창출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거대 제국을 아우르는 사법 시스템을 만들고, 제국 문명의 기초가 되는 문자를 창안해낸다. 사회·경제·군사적으로 효율적인 체계 도입을 위해 고심했으며, 무역을 촉진키 위해 지폐 활용도 활성화한다. 나아가 교통과 통신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역참을 설계한다. '정복'이라는 한 번의 성공을 '수성'이라는 지속가능한 성공으로 발돋움시킨 것.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칭기즈칸의 손자로 1251년 형 몽케가 제4대 칸의 자리에 오르자 중국 방면의 대총독에 임명, 고비사막 남쪽의 금연천을 근거지로 삼고 지금의 중국 원난성에 있던 대리국을 멸망시켰으며 티베트와 베트남까지 공격했습니다.

    형주분지에 안무사, 허난에 경략사, 경조분지에 선무사를 두고 중국 통치에 타고난 재질을 보였고 1244년 유생 왕악을 고비사막 이북 지역으로 초청하는 등 일찍부터 한나라 문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1253년 성리학자 왕순에게 명하여 맏아들 친킴의 교육을 맡겼습니다. 결구 ㄱ그의 휘하에는 유병충, 요추, 허형 등 성리학계의 중국 지식인들이 모였습니다.

    1259년 남송을 몸소 무찌르던 형 몽케칸이 쓰촨의 병영에서 병사하자 국도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던 막애 아우 아리크부카를 의식해 이듬해 이례적으로 중국의 카이핑부에서 대칸의 자리에 올랐고 중국식으로 건원하여 중통이라 했으며, 이후 약 4년동안 싸워 아리크부카를 굴복시킨 후 도읍을 연경으로 옮겨 대도라 일컫고 1271년 역경에 입각해 나라 이름을 원이라 했습니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룬 것은 1279년의 일이나 아리크부카의 잔당인 하이두와 도와의 반란을 계기로 몽골제국에 분열이 일어났고 30여년에 걸친 동서 두 칸의 실력항쟁기를 통해 원나라는 뱃길로 일한국과 친교를 나누는데 집중하며 세계 제국의 면목을 유지합니다. 쿠빌라이 35년간의 치세에서 안으로는 툴루이가 분지의 실력가인 진정의 사씨와 고성의 동씨의 협력하에 한인의 세습적 봉건제후제를 폐지, 중앙집권제를 확립했고 금나라와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관제를 정하고 세제를 정비했으며 밖으로는 미얀마, 참파, 자바, 일본등을 공격,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대부분을 원의 영역 안에 넣었습니다.

    다만 외정의 강행이 야기한 재정난은 쿠빌라이가 이재의 신하게에 의지할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는데, 즉 아하마, 노세영, 상가 등 주로 색목인 계통의 상인적 정치가의 활약을 허용, 쿠빌라이 사후 그 뒤를 이은 테무르는 일찍 죽은 황태자의 친킴의 아들입니다.


  •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 사실상 통일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이후에는 원나라가 시작된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칸호는 세첸 칸, 휘는 보르지긴 쿠빌라이이다. 휘의 어원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백조를 뜻하는 튀르크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라는 중세 몽골어 어휘가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칭기즈 칸의 막내적자인 툴루이의 4남이자 전대 대칸이었던 몽케 칸의 친동생이다. 그리고 제국대장공주의 아버지이며 고려 원종의 사돈, 충렬왕의 장인, 충선왕의 외할아버지, 계국대장공주와 복국장공주의 증조할아버지, 조국장공주의 고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또한 덕녕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4세손이 된다.


    1260년, 대칸의 자리에 올라 대칸의 자리를 두고 동생 아리크부카와 내전을 벌여 1264년에 이겼다. 그러나 내전 이후 친(親) 아리크부카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권은 중국과 몽골 초원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몽골족의 전체 판도는 역사상 최대 규모에 달했다. 무려 전 세계 인간이 거주 가능한 지역의 1/5을 차지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대규모 원정은 쿠빌라이 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동시대의 마르코 폴로 덕분에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서구 세계가 잘 아는 몽골 제국의 군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