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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90년대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 하였는데요 그 당시 북한의 최고위급이라 상당한 화제였었습니다 황장엽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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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피선된 이후 1972∼1983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1980년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장,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원장, 1987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장 및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북한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얼마 안되는 주체사상 정립에 기여한 인물로 김일성-김정일부자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아 요직(要職)에 앉았으나, “조국(북한)의 체제에 의분(義憤)을 느껴 그 변혁을 도모하기 위해 망명했다”고 자신이 쓴 수기(手記)를 통해 망명동기를 밝혔다. 망명 이후 김정일정권의 타도를 위해 각종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하였으나, 당시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 때문에 그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한 채 칩거(蟄居) 생활을 하였다. 이후 이명박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대한민국내 보수세력과 김정일정권의 타도 및 북한주민들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폭로하는 일에 전념하던 중 2010년 10월 자연사로 생을 마쳤다.


    황장엽이 한국으로의 망명 전까지 김일성-김정일부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자신의 신변불안과 위협 때문에 정치적 망명을 택한 후 비록 말년(末年)에 한국에서 반 김정일활동에 진력했다고 하나, 오늘날 북한주민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족벌체제하에서 온갖 고통을 감내(堪耐)해야 하는 근인(根因) 중 하나인 주체사상을 정립하는데 적극 기여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김정일체제의 잔혹상을 고발하고 열악하기 이를데 없는 북한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던 공과를 결코 폄하(貶下)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6년 당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고 이후 당-정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후 김일성이 사망하고 북한내에서 심상치 않은 사상, 정치투쟁의 움직임이 일자 1997년 중국 베이징에서 김덕홍과 함께 한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장엽 비서가 망명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북한 체제에 대한 실망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995-1996년에 북한에서 발생한 기근을 목격했고, 북한과 비슷했던 공산주의국가들의 붕괴를 보기도 했기 때문에 북한 체제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탈북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얄려진 이유 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아마 황장엽이 당시 지배 세력인 김정일 일가로부터 무엇인가 숙청 당할 만한 실수등을하고 도피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 봅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96년 5월 10일, 북한 관영지 <로동신문>은 당 내에 수령을 받드는 척하며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가 있다는 기사를 내놓았다. 이는 숙청을 암시하는 기사였다. 다시 7월 김정일은 황장엽에게 사상비판을 가했다. 이미 황장엽은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의 권력 기반 장악을 위한 타겟이 된 상태였다. 당시 황장엽은 외국에 가서 주체사상 강의를 할 때 김정일이 원한 혁명적 수령관이 아니라 군중노선만 얘기하면서 김정일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고 김정일의 연회정치, 선군정치에 대해 비판적이라서 김정일이 슬슬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