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타고르가 조선은 아시아의 등불이라고한 근거가 있습니까?
일제 시대 인도의 타고르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조선은 아시아의 등불이다라고 물론 우리는 들으면 좋은 이야기지만 그렇게 말한 근거나 배경은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6년 타고르가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조선 유학생들을 통해 일제에 강제 점령된 나라, 조선에 관해 알게 되었다. 당시 인도 역시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타고르는 일본을 3차례나 더 방문했고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난했다. 그리고 1929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4행의 영문시 “동방의 등불”을 메모에 적어 건네주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동아일보에 공개된 주요한 번역본
그의 시는 나라를 잃은 조신인들에게는 큰 격려이자 희망의 불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타고르는 조선의 예술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님의 침묵>의 시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집에 <타고르의 시를 읽고>라는 시를 싣기도 했으며, 그의 시 전반에서 타고르의 시풍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2011년은 타고르 탄생 150주년으로 한국에서도 기념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대학로에 타고르의 흉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도의 시성, 타고르 (인도 콜카타 여행)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된 자유시인데 당시 주요한의 朱耀翰)의 번역으로 실린 이 시는 《동방의 등촉 혹은 동방의 불꽃》이라는 제목으로도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1929년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아 일보 기자로부터 한국 방문을 요청받았으나 응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여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타고르가 한국을 소재로 쓴 두 편의 시 가운데 하나로, 일제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인들이 희망을 잃지 말고 꿋꿋하게 싸워 독립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낸 격려의 송시(頌詩)인데 당시 인도 또한 우리와 같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이기에 아마도 동변 상련의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9년 4월 2일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에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해준 짧은 시가
<<동방의 등불>>입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등불이 되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으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서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 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위대한 성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아들로서 일찍이 시를 짓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낸 뒤 시가집 〈아침의 노래〉(1883)로 그의 예술의 기초를 확립했다. 1890년에는 그의 성숙된 천재성을 보여주는 〈마나시 Mānasῑ〉라는 시모음집을 펴냈는데 〈마나시〉에는 형식에 있어서 오드를 비롯해서 벵골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시형을 지닌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시들도 상당수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또한 그가 지은 최초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들도 포함되어 있다.1
그는 1891년 실라이다와 사이야드푸르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부동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은 나중에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1912년에 출간된 〈한 다발의 이야기들 Galpaguccha〉에는 그들의 '비참한 삶과 자그마한 불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모아졌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으나, 결코 인도의 독립을 지상의 목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라이다에서 벵골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었다. 이곳에 머무는 여러 해 동안 그는 〈황금 조각배 Sonār Tari〉(1893)·〈경이 Citrā〉(1896)·〈늦은 추수 Caitāli〉(1896)·〈꿈 Kalpanā〉(1900)·〈찰나 Kṣaṇῑkā〉(1900)·〈희생 Naibedya〉(1901) 등의 작품집과 함께 〈Chitrāṇgadā〉(1892), 〈Chitra〉라는 제목으로 1913년에 재출간)와 〈정원사의 아내 Mālinῑ〉(1895)라는 서정적 희곡을 출간했다. 1902~07년 사이에 처자식과 사별한 그는 울적한 심경을 훌륭한 시로 형상화했다. 그는 1913년 널리 알려진 작품집 〈기탄잘리 Gῑtāñjali〉('찬송을 헌정함'이라는 뜻, 1910)의 영역본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로 보냈다. 그의 작품들 상당수가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영역되었지만, 영역본들은 벵골어 원작에 비해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시와 단편소설 외에 주목할 만한 소설도 여러 편 썼는데, 〈고라 Gorā〉(1907~10, 영역 1924)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타고르는 1901년 볼푸르 근처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세우고 인도와 서양의 각 전통에서 최상의 것들을 선별해 조화시켜 가르치고자 했다. 그는 1921년 그곳에서 비스바바라티대학교를 세웠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창간에 즈음하여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기고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