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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네덜란드의 선원들을 돌려보내지않았나요?

조선은 네덜란드의 무역선이 난파되고 살아남은 36명을 돌려보내지않고 13년 넘게 억류하다가 살아남은 16명중 8명이 일본으로 탈출하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남은 선원들은 석방했는데 왜 조선은 이들을 되돌려보내지않고 억류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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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에 억류된 서양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헨드리크 하멜과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1]은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어 일한 선원이었다고 합니다.

    1653년 스페르베르(네덜란드어로 새매)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 좌초했습니다. 이때 버려진 배를 이용해 탈출하려 했으나 돛대가 부러져 무산된다. 당시 조선 효종의 명으로 이 사람들은 한양으로 즉시 압송되었습니다.

    곧바로 한양에 올라 여러 조사를 받은 후 조정의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효종의 어가를 수행하는 직을 임명받았는데, 강제적임에도 매월 쌀 40kg의 넉넉한 봉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조선에 청나라 사신이 오자 그들 앞에 모습을 내보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두 번째 탈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정부가 청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묵인시켰다. 청 사신도 그들에게 별 관심도 없었던 듯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이방인에게도 예와 체통을 중시했으므로 표류해온 외부인은 송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들보다 30년전 표류해온 같은 네덜란드인 박연은 당시 명나라의 정세가 혼란해 명나라로 보내지도 못했고, 일본을 통해 송환하려하나 일본 에도 막부는 박연이 키리시탄이라는 이유로 거부, 조선에 정착하게 됩니다.

    북벌이라는 특이한 상황으로 하멜과 박연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예외적인 사례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귀인이었던 호국의 "아도르프 브롤(Rijcklof van Goens)"는 조선과의 무역을 강화하고자 조선에 무역 관리소를 설립했습니다.

    네덜란드 선박은 금, 은, 화폐, 목재, 소득 등의 무역품을 싣고 조선과 무역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1653년에 "알랜호(Raropier Ankeveen)"라는 네덜란드 선박이 풍랑으로 침몰하여 큰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무역을 중단하고 네덜란드 관리와 협상을 요구했습니다.

    사건의 의미와 결과:


    이 사건은 네덜란드와 조선 간의 무역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역 중단과 협상의 결과로 네덜란드 무역선은 조선으로의 출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고, 상업적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정부의 주권을 강조하는 한편, 무역 파트너로서의 네덜란드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네덜란드와 조선 간의 무역 관계는 회복되었고, 네덜란드 무역선은 조선으로 다시 무역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지배력은 감소하였고, 무역 관계는 한중 일본과의 관계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시대의 국제적인 무역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조선의 대외 무역 및 외교 정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