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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

계유정난때 죽임을 당한 김종서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영화 관상을 보면 김종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매우 고위직인 것으로 보이지만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요.


김종서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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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83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무관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405년 문과에 급제, 1419년 사간원우정언으로 등용되고 이어 지평, 집의 , 우부대언을 지냈습니다.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해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성을 확장했으며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7년 동안 맡았습니다. 여진족들의 정세를 탐지, 보고하고 그에 대한 대비로 비변책을 지어 건의했습니다.

    세종의 명으로 변방에서 중앙의 관직을 맡았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대신으로 역할했으며 1440년 형조판서로 승진,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 1449년 권제 등이 고친 고려사가 잘못되었다 하여 왕명으로 개찬하게 되자 춘추관지사로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했습니다.그는 변방의 장수에서 역사서 편찬에도 능력을 발휘, 평안도도절제사를 거쳐 1450년 좌찬성으로 평안도도체찰사를 겸했으며 다음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이 되었으며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했습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과 함께 좌의정으로서 문종의 마지막 유명을 받아 12세의 어린 단종을 보필, 대호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명신이었으나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을 쓰고 효시됨으로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05년(태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해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다.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踏驗損實: 실지 답사를 통해 수확량을 조사함)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 상황을 조사했고, 같은 해 10월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 거쳐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 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해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左代言)인 김종서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 이조의 인사권)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 지방에서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말을 놓아 기를 수 있는 곳의 수효를 조사해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했으며, 이듬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柵堡)를 살펴 정했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해 요동 지방이 소란해지자 그에 대처하기 위해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소환되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左贊成兼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高麗史)』를 찬진했고, 같은 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해 올렸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해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육진 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이자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 개척에서 이룩한 공로가 있어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엄정하고 밝은 문인·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강직·엄정한 면모는 사헌부·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고제(古制)와 의례에 조예가 깊어 육진 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하였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위세가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해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였다.


    세종은 권제(權踶)·안지(安止) 등의 『고려사(高麗史)』 개수 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그 작업은 2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이 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집현전 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 수준의 학자·관료였던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해 『고려사(高麗史)』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김종서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는 면이라 할 수 있다.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高麗史)』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의 『고려사(高麗史)』 편찬을 건의하자, 왕이 즉시 편찬의 착수를 명해 이듬해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志)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아래서의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 제거되었다. 그 뒤 1678년(숙종 4)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