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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낙타174
순수한낙타17423.06.13

대일 외교 관계에서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은 역사

최근 일본과의 외교 문제로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몇번 사과를 했던 것 같은데

언제 어떤 식으로 사과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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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총리 자격으로는 지난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일왕 자격으로는 1984년 9월 히로히토 전 일왕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최소 53차례로 집계됐습니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주요 유감 표명과 사과를 정리했습니다. 일왕과 총리 자격은 아니지만, 참고하시라고, 한일 관계의 분기점이 됐던 고사로 젠타로 전 외무상의 유감 표현과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담화도 포함했습니다.


    일왕과 총리 입에서 나온 표현 가운데, 처음으로 '잘못'을 말했을 때는 1984년, 자신들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첫 표현하고 '식민 지배'를 인정한 시기는 1993년입니다.


    1993년은 한일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인 사과가 많이 나왔습니다. 당시 일본 총리는 자민당이 아닌 연립 내각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였습니다. 그해 11월 호소카와 전 총리는 나아가 "창씨개명과 위안부, 징용 등의 여러 형태로 괴로움과 슬픔을 당한 것에 대해 가해자로서 마음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이는 선언적 의미의 사과가 아니라, 창씨개명과 위안부, 강제 징용 문제 등 세부적인 사안에 대한 사과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같은 해 호소카와 총리는 일본 국회 연설에서도 "태평양 전쟁은 침략 행위"라고 발언했는데, 갑작스러운 사과 정국에 극우 단체의 반발도 커져 갔습니다. 침략 행위 발언에 불만을 품었던 한 우익 단체 회원은 도쿄 신주쿠의 한 호텔에서 총리를 향해 총을 겨눴다가 경찰에 의해 발각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암살 미수 사건은 한일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정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선언은 양국 정상이 직접 서명했던, 일본 정부의 사죄를 처음으로 문서화 한 사례로 기록됐습니다.


    1990년대 일본은 호소카와 전 총리의 사과와 함께,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 식민지배와 침략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사죄하는 '무라야마 담화'까지, 과거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긍정적인 신호들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적극적으로 강행하면서 주변국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독도와 역사 교과서 문제도 불거졌습니다.


    이런 기조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재임 기간 강해졌습니다. 그래도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1년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향해 참배하고,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걸 공식화했지만, 아베 전 총리는 그간 일본의 사과를 부정하는 역사 왜곡 발언을 자주 이어갔습니다. 한국 언론은 이를 '망언'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아베 전 총리가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팀이 집계한 아베 전 총리의 공식적인 사과 표현은 19차례였습니다. 재임 기간이 길었던 만큼 사과나 유감 발언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총리 자격의 공식적인 사과 발언과, 공식적인 역사 왜곡 발언이 동시 나오면서 늘 사과의 진정성이 의심 받았습니다. 가령,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불과 6달 뒤 계승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S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