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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쌍7214
한알쌍721423.05.18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이유가 먼가요?

임진왜란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 되었는데

인조반정으로 인해 폐위가 되었는데 무슨 잘못인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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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 법을 어김)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 서얼 출신 7인이 은상인을 살해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옥사)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다. 선왕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유훈을 받들은 일곱 신하) 중 재직자인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서성(徐渻)·한준겸(韓浚謙)을 내쫓았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하였다. 또,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아버지로 뒤에 원종으로 추존)의 아들 능창군 전(綾昌君佺: 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금고하였다가 살해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에 이르러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및 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반대하자, 오히려 이들을 멀리 귀양보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발론(發論)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尊號)를 폐하여 다만 서궁(西宮)이라 칭하고, 공봉(供奉: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바침)을 감하고 조알(朝謁: 왕을 조정에서 찾아뵘.)을 중지시켰다.

    그런 뒤에도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白大珩)을 시켜 이위경(李偉卿)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慶運宮)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등이 급히 이르러 추방해 실패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의 존호를 박탈하고 동생을 살해함.) 등의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중요한 구실을 주었다.

    내용

    [네이버 지식백과] 인조반정 [仁祖反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으로 15년간(1608~1623) 재위하였으나, 정변을 맞아 폐위당한 인물입니다. 부왕 선조의 핍박과 명나라의 세자 책봉 거부 등 숱한 난관을 뚫고 즉위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적을 제거하는 데 집착하면서 주로 대북 계열을 중용하였으며,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무리수까지 두었습니다. 마침 명과 후금이 전쟁을 벌이자, 명과는 사대관계를 유지하되 후금과도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숭명배금 노선을 절대시한 신료들의 거센 반대가 장기화하면서 국가 행정이 사실상 마비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했습니다.


    즉, 1622년(광해군14)에는 명 황제가 감군어사(監軍御史)를 직접 파견하여 조선에 추가 파병을 명하였으나, 당장 수락해야 한다는 신료들과는 달리 광해군은 칙서 이행을 거부하였습니다. 감군어사가 빈손으로 돌아가자마자 모든 신료는 광해군과 논쟁하며 정청(庭請)을 이어갔습니다. 그 결과, 국가 행정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고군분투하던 광해군은 화병이 심해지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무혈 정변(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국왕에서 폐위되어 유배길에 올랐습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할 때 유배지를 옮겼는데, 강화도‧태안‧교동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까지 내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