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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메추라기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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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한강의 다리인 인도교가 폭파가 되었는데 왜 작전에 실패를 했다고 평가를 하는가요?

625전쟁 때 우리나라가 북한에게 밀려 서울이 점령 당하기 전에 북한군의 내려오는 것을 저기 하기 위해 한강의 다리인 인도교가 폭파에 성공을 하였는데 왜 작전에 실패를 하였다고 평가를 하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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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Slow but steady
      Slow but steady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40분경 한강 인도교마저 절단함으로써 시민들의 발을 꽁꽁 묶어놓았다. 그래서 서울 시민들은 피난의 적기를 놓쳤고, 이 때문에 상당수 시민들이 서울 수복 뒤에 북한군 부역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 폭파로 많게는 800명, 적게는 200여 명이 사망했을 것이란 추정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고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서울 방어에 참가했던 아군은 당시 3개 사단의 퇴로가 끊겼고 피란민도 당시 서울 시민은 140만명 이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개의 단선철교는 폭파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후에 북한군에 의해 이용되기도 했으며 서울 외곽을 지키기 위해 남아있던 국군의 주력부대와 수많은 시민들을 강북에 남겨두고 성급하게 한강교를 폭파해 그 퇴로를 끊은 것은 우리의 전사에 오점으로 남아 국민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25전쟁 때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것은 너무도 빨리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기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온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였으나 북힌군은 미아리를 넘지 않은 상태였고 한강까지 도달하는데 1-2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차량이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강다리를 폭파시킴으로써 군 차량 포함 72대가 한강 물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하고 피난민들이 다리를 건널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채병덕 육군참모장이 책임자로 지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