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이 정말 공산주의자였나요?
찰리 채플린이 미국에게 공산주의로 찍혀서 미국에서 쫓겨났다고 하는데요.
정말 찰리 채플린이 공산주의자 였나요?
공산주의 활동을 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보드빌 무대 배우였던 부모 밑에서 자라 다섯 살 때부터 무대에 올라 전설적인 희극 배우이자 감독이 된 찰리 채플린의 생애는 익히 알려져 있다. 일찍부터 영국 무대에서 인기를 얻고 프랑스와 미국에 순회 공연을 가게 된 찰리가 안착한 곳은 영화 스튜디오였다. 무성영화 시대의 유명 제작자이자 배우였던 맥 세네트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세넷의 키스턴스튜디오에서 35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채플린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 방랑자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헐렁한 바지에 꽉 조이는 윗도리, 모자는 작게, 구두는 크게 신는 방랑자 찰리는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지팡이를 흔들며 우쭐거리는 인물을 연기했다. 생전의 채플린은 스스로 방랑자 캐릭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랑자 찰리는 여러 면모를 갖고 있다. 떠돌이지만 신사, 시인이자 몽상가이다. 외로운 녀석이지만 언제나 로맨스와 모험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과학자이자 음악가, 공작이자 폴로 선수이다. 그는 담배꽁초를 줍는다거나 애들한테 사탕을 뺏는 따위의 치졸한 짓은 하지 않는다. 정당한 경우에는 숙녀를 걷어차기도 한다. 물론 매우 화가 났을 때만.”
채플린은 키스턴과 주급 100달러로 계약한 지 1년 만인 1915년에 주급 1,250달러, 보너스 1만 달러라는 굉장한 조건으로 에사네영화사로 이적했다. 얼마 후 찰리는 다시 뮤추얼영화사와 주급 1만 달러, 보너스 15만 달러로 계약했다. 채플린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계약한 날 저녁 타임 스퀘어 전광판에 그날의 뉴스 속보로 뜰 정도였다. ‘채플린, 뮤추얼사와 연 67만달러 계약'. 뉴욕의 밤하늘 아래 채플린이 거부가 됐음을 공인받는 날이었다. 겨우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채플린은 일찍이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 그 모든 것이 방랑자 찰리의 매력 때문이었다.
아직 일관된 내러티브가 없던 무성 슬랩스틱 코미디영화 시절에 채플린은 엎어지고 자빠지는 활동사진의 희극적 쾌감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다른 영화에는 없는 심오한 비유적 의미를 몸동작과 화면 구성을 통해 끌어냈다. 숱한 단, 중편영화 시절을 거친 후에 채플린이 연출하고 연기한 <서커스> <키드> 등의 장편영화에서 채플린은 방랑자 캐릭터의 불가해한 페이소스와 유머를 최대한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1920년대의 대표작인 <황금광 시대>의 한 장면에서 찰리는 굶주림에 몰려 신고 있던 구두를 먹는 착란을 연출한다. 직접적으로 굶주림을 표현하는 대신 찰리는 다른 방식을 택한 것이다. 마치 푸짐한 고기라도 되는 양 그는 맛있게 구두를 요리해 먹는다. 후배 희극 배우 제리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완전한 천재의 작품’이다. “그는 구두를 먹는 방법을 창조해냈다. 그는 우리도 구두를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야 할 만큼 매력적인 방법으로 구두를 먹는다. <황금광 시대>에서의 그 굉장한 장면을 보고 나는 ‘나도 먹었던가?’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건 위대한 발명이다.”
그 장면은 또한 물질적인 것의 추구가 인간을 동물로 만든다는 <황금광 시대>의 주제를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서부 시대의 골드 러시를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황금에의 집착은 모든 인간관계를 타락시킨다. 황금 때문에 어떤 인간은 살인을 저지르고, 황금 때문에 어떤 인간은 친구들과 여자들을 집안의 가구 다루듯 한다. 찰리가 반했던 아름다운 여성 조지아 역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냉정한 성격의 여자로 변한다. 친구인 짐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게 되자 찰리를 음식으로 착각하고 먹으려 든다. 짐이 찰리를 커다란 닭고기로 착각하는 이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거기에는 물질을 매개로 한 인간들의 식인주의에 대한 풍자가 신랄하게 숨어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찰리와 짐은 오두막이 바람 때문에 절벽 아래로 쓰러질 상황에 처하자 상대를 서로 발로 밀쳐내면서 자기만 살겠다고 안달이 나 있다. 그 모습은 흡사 개를 연상시킨다.
클로즈업의 마술
채플린이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무렵 슬프게도 무성영화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채플린의 또다른 대표작 <서커스>는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 싱어>가 개봉한 지 5일 후에 촬영에 들어갔다. 채플린은 이 영화에 <재즈 싱어>의 알 졸슨이 불러 유명해진 곡을 주제 음악으로 삽입했다. 채플린은 그 노래의 곡조를 느리면서도 슬프게 마치 장송곡처럼 편곡해 붙여 넣었다. <서커스>에서 채플린은 큰 인기를 끌던 방랑자 찰리가 쇠락한 서커스단에 홀로 남겨지는 쓸쓸한 신세를 묘사한다. 방랑자 찰리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지만 현실의 채플린은 그렇게 쉽게 몰락하지 않았다. 유성영화 시대가 열린 후에도 여전히 무성영화 스타일로 제작된 <시티 라이트>는 채플린의 희극적 재능이 매체를 관통하며 살아남을 수 있는 호소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역시 방랑자 찰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시티 라이트>의 내용은 희극적이면서도 슬프다. 찰리는 눈먼 처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찰리를 부자 남자로 오해한다. 우연히 알코올 중독에 걸린 백만장자를 알게 된 찰리는 매일 밤 그의 친구 노릇을 하면서 돈을 받지만 아침에 깨어나면 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백만장자는 찰리를 경찰에 절도범으로 고소한다. 감옥에 들어간 찰리가 출옥했을 때 찰리가 준 돈으로 수술을 받은 처녀는 시력을 되찾은 후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 꽃 가게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찰리를 본 그녀는 그를 불쌍한 홈리스로 오해해 적선하려 한다. 찰리의 손을 잡은 순간 그녀는 알게 된다. 자신을 구원해준 백만장자 신사가 바로 이 초라한 홈리스 사내라는 것을. “당신이?”라고 그녀는 묻는다. 카메라는 찰리의 얼굴 클로즈업에 고정돼 있다. 찰리의 눈은 불안한 희망으로 가득 찬다. 그는 그녀를 잃게 될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화면은 서서히 어두워진다. 리처드 시켈의 다큐멘터리에서 우디 앨런은 <시티 라이트>의 마지막 장면을 두고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탐구이다”라고 말했다. (앨런의 영화 <맨해튼>은 <시티 라이트>를 인용한 우디 앨런의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가 대단한 성공을 거둔 후에 자신감을 갖고 또 한 편의 무성영화 <모던 타임즈>를 연출한다. 이 영화는 부분적으로 사운드 효과가 나오지만 대사는 자막으로 처리하는 반(半) 무성영화 스타일로 만들어졌으며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기계 문명의 노예가 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은유하는 기가 막힌 사운드 효과를 만들어낸다. 찰리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공장 어셈블리 라인 장면에서 화면에는 음악 대신 경고음, 벨소리 등이 깔린다. 조잡한 공장 소음이 아니라 마치 심포니를 듣는 것처럼 정교하게 화음이 어우러지는 그 사운드의 공명 효과는 매우 신중하게 선택되고 양식화된 일종의 대체 음악이었다.
광대에서 예술가로
<모던 타임즈>를 끝으로 채플린은 무성영화 시대의 발명품인 방랑자 찰리 캐릭터를 은퇴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대신 과감한 도박을 했다. 채플린은 아돌프 히틀러의 이미지를 영화에 끌어들인 <위대한 독재자>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다수 할리우드 스튜디오 수뇌들은 채플린이 그 영화를 만들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들은 이 영화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상영되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했다. 아직 미국이 2차 세계 대전 참전을 망설이고 있을 때 참전 여론을 확산시킨 <위대한 독재자>는 사람들의 의식을 끌어올렸다. 유대인 이발사 찰리가 그와 외모가 흡사한 독재자로 오해받아 파시스트 집회에서 그 유명한 일장 연설을 하는 장면은 최초로 찰리가 스크린을 통해 말한 기념비적 장면이다. 당시의 많은 평론가들은 평화를 호소하는 내용의 그 연설이 순진하고 감상적이며 영화의 내적 리얼리티를 파괴한다고 비난했다. 이발사 찰리는 갑자기 매우 지적인 연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오늘날 다시 이 장면을 보면 거기에는 브레히트의 연극을 보는 듯한 격한 공감이 스며 있다. 배우였던 채플린의 딸 제럴딘 채플린은 그 장면을 두고 “아버지가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장면”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때까지 스크린에서 이발사이고 독재자인 척한다. 카메라가 서서히 다가갈 때 그는 연설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그는 더이상 유대인 이발사가 아니다. 독재자도 아니다. 그는 찰리 채플린이 되기 시작한다. 분장 없이도, 얼굴에 어떤 조작도 하지 않고 순식간에 나이 든 얼굴이 되어, 실제 찰리 채플린이 되어 관객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그의 연기였다.”
채플린의 모든 영화는 얼마간 위험을 감수하고 만들어진 것이며 뻔하거나 쉬워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시티 라이트>와 <모던 타임즈>를 유성영화 시대인 1931년과 1936년에 만든 채플린도 서서히 경력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채플린의 영화 중 최초로 흥행에 실패한 <살인광 시대>에서 채플린은 젊은 처녀들을 유혹해 결혼한 다음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먹는 사악한 인간으로 나온다. “죄악 없이는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채플린은 주장했지만 당대의 관객은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인류에 대한 채플린의 그 심오한 비관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공산주의에 경도된 채플린이 서서히 사회를 공격하고 있다고 그의 비판자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찰리가 아내를 죽일 목적으로 아내를 이층의 침대로 데려가는 한 장면에서 가장 사악한 것에서 시적인 것을 뽑아내는 채플린 연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찰리가 아내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일 때 마치 뱀처럼 그의 어조는 그녀의 몸을 감고 돈다. 아내가 침대에 들었을 때 찰리는 창가에 서서 잠시 보름달을 본다. “거기서 뭐해요?”라고 젊은 아내가 묻는다. “아냐. 아무것도”라고 찰리가 답한다. 그의 그림자는 화면에서 빠져나간다. 음악은 고조되고 밤은 아침으로 바뀌며 모든 것이 끝나 있다.
단순하지만 거대한 영화적 이미지
<살인광 시대>가 흥행에 실패한 후로 채플린의 경력은 완만하게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당시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 열풍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채플린이었다. 공산주의로 몰려 미국을 떠나게 될 그 즈음에 만들어진 <라임라이트>는 이제 시대를 놓친 한 위대한 희극인의 삶에 관한 자전적 성찰이 짙게 배어 있다. 사람들을 웃길 능력을 잃어버린 뮤직홀 코미디언의 이야기인 <라임라이트>에서 주인공 칼베로는 악몽을 꾼다. 그의 코미디 연기는 거대한 극장 홀에서 박장대소를 끌어내지만 막이 내리고 커튼콜을 위해 그가 무대로 걸어 나가면 객석에는 아무도 없다. 칼베로는 무대 앞으로 나와 객석이 텅 빈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예감하는 칼베로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동료 희극인의 도움을 받아 생애에서 가장 충만한 무대 공연을 벌인다. 그리고는 심장 발작으로 쓰러진다.
<라임라이트>에서 채플린은 그의 파트너 역에 버스터 키턴을 캐스팅했다. 키턴은 전성기였던 1920년대를 보낸 후 그의 영화사와 명성을 동시에 잃어버렸고 스타덤에서 물러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퇴락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세월의 풍파는 그에게서 총기를 앗아갔지만 그의 익숙한 희극인 본능은 화면에 생생히 불려 나온다. 그는 영화 속에서 잃어버린 관객을 되찾으려는 채플린의 갈망을 나눈다. 이 캐스팅은 누구에게나 쉽게 잊을 수 없는 슬픔을 전해줬다. 영화 속에는 분장실에서 분장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전경에는 찰리의 얼굴이 보이고 후경에선 그런 찰리를 보고 있는 키턴을 담아내는 그 장면에서 관객의 눈은 찰리를 향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는 키턴의 모습을 은근히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위치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찰리가 죽을 때 그를 지켜보는 이는 키턴이다. 앞 장면의 반향을 떠올리게 하며 비극적인 감흥을 부르는 이 끝 장면에서 두 전설적인 희극인은 영화 역사상 가장 근사한 퇴장을 준비한다.
채플린은 늘 단순한 카메라 앵글을 택했고 뮤직홀 같은 간단한 세트에서 영화를 찍었다. 생전의 스탠리 큐브릭은 “찰리는 늘 천편일률적인 세트에서 단순한 카메라 워크로 작업했다. 그런데도 그의 영화가 그렇게 비상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마술이다”라고 말했다. <해리와 톤토> 등을 연출한 감독 폴 마주르스키는 “채플린이 ‘영화적이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틀렸다. 채플린의 클로즈업 사용은 위대했다. <시티 라이트>에서의 소녀의 얼굴, <키드>에서의 재키 쿠간의 얼굴, 그 얼굴 표정은 아무나 잡을 수 없는 것이다. 프레드 아스테어의 춤처럼 채플린의 클로즈업은 시적인 진실을 전해준다. 이젠 그런 시적인 감동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황금광 시대>에서 찰리가 닭을 향해 달려들거나 절벽 끝에 오두막이 매달려 있는 장면에서, 길 위에 추락하는 방랑자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믿어지지 않는 영화적 이미지다. <모던 타임즈>에서 공장 어셈블리 라인을 찰리가 종횡무진하는 장면은 그 자체가 거대한 영화적 이미지다. 극도의 간결함을 통해 채플린이 이룩한 그 영화적인 이미지의 장대함은 이제 다른 사람이 성취할 수 없는 전설의 영역에 묻혔다.
우리의 휴머니티를 흡수한 남자
채플린은 희극인으로서 평생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았다. 채플린 다큐멘터리를 만든 리처드 시켈은 밀로스 포먼에게 들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 “채플린은 어디를 가나 세상이라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재미있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다. 채플린이 칸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을 때 아직 청년 감독이었던 밀로스 포먼은 채플린의 그런 희극적 자질을 목격했다. 군중이 채플린을 향해 몰려들었고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채플린에게 열광했다. 채플린은 노인이었고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채플린은 그들을 위해 뭔가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그는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움켜쥐고 그가 수많은 영화에서 보여준 방랑자의 캐릭터 몸짓으로 멋지고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연출했다. 군중은 웃음으로 자지러졌다. 그게 채플린이었다. 그게 그의 욕망이었다.”
사실, 채플린의 방랑자 찰리 캐릭터는 추상적인 인물이다. 누구도 현실에서 그렇게 옷을 입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추상적인 캐릭터는 채플린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이 됐다. 리처드 시켈은 말한다. “채플린은 매우 양식화된 표현으로 우리의 ‘휴머니티’를 흡수한 남자였다. 그는 가장 근본적이고 심오한 인간의 감정을 다룬 감독이자 배우였다.” 그의 말이 맞다.
채플린의 생애*
런던 시민의 3분의 1은 최저생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1889년 4월16일, 찰스 스펜서 채플린,런던에서 태어나다.
아버지 찰스, 어머니 한나는 모두 연예인.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
1890년(1세) 채플린의 부모 별거
1899년(10)세 아버지 창스사망, 당시37세
어머니 한나의 불행은 채플린의 모든 작품에 스며 있다.
1984년(5세) 어머니 한나,후두염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어 무대
일을 쉬게 됨.
1896년(7세) 어머니,빈곤 때문에 발광.정신병원에 입원.
1898년(9세) 어머니 퇴원하여 찰리와 다락방에서 생활하다.
1900년(12세) 어머니 다시 발병하여 입원.
1922년(33세) 출세한 찰리,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와 산타모니카의
별장에서 간호를 받으며 함께 살다.
1929년(40세) 어머니 한나 사망.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싸움
1895년(6세) 한나와 아이들,가난의 수렁에서 아파트를 전전.
1896년(7세) 어머니 정신병으로 찰리와 스드니는 고아원으로. 그해
11월,형 시드니는 선원학교에, 찰리 홀로 고아원에 남다.
1896년(9세) 어머니 퇴원. 람베드의 다락방에서 찰리와 생활.
찰리는 천부적인 배우였다
1894년(5세) 갑자기 목을 다치게 된 어머니의 대역으로 꼬마 찰리,
무대에서 노래부르다.
1900년(11세) 판토마임 극에 와키 역으로 출연.
1901년(12세) 샬록 홈즈의 아들 역으로 출연.
형 시드니와 같이 지방 순례를 계속하다.
1907년(18세) 프레드 카노 극단과 계약. 판토마임을 연기하다.
1909년(20세) 파리에서 순회공연.
아메리카여! 너를 정복하러 왔노라!
1910년(21세) 채플린, 카노 극단의 미국 순회공연에 참가. 2년간
캐나다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순회공연.
1912년(23세) 봄에 귀국,10월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다.
영화의 시대가 채플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1913년(24세) 맥 세네트의 키스톤(Keystone) 영화사와 게약. 주급150달
러
1914년(25세) '생계(Making a living)를 첫 작품으로 하여 35편의 영화에
출연.
쌓이는 돈에 어쩔 줄 모르는 채플린
1915년(26세) 엣사네이(Essanay) 영화사와 계약. 1년동안 14편에 출연.
주급 1,250달러.
1916년(27세) 뮤츄얼 영화사와 연간 12편의 출연 계약.주급 1만 달러, 특별
계약금 1만 5천 달러.
1917년(28세) 퍼스트 내셔녈(First national) 영화사와 계약.
2권 8편으로 107만 5천 달러 받음. 다른 영화사 흥행수입 의 절반.
1918년(29세) 헐리우드 선셋 대로에 스튜디오를 만들다.
전쟁이 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1914년(25세)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7년(28세) 미국 참전, 채플린을 징병기피자라고 비난.
1918년(29세) 제3차 자유공채 모집 캠페인에 동료 페어뱅크스 등과 더불어 참가.
전시공채 판매 촉진을 위한 선전영화인 '공채'를 제작. 영화 '어깨총'공개. 제1차 세계대전 끝남.
채플린은 소녀들의 적인가?
1918년(29세) 16세의 여배우 밀드레드 헤리스와 결혼.
1919년(30세) 밀드레드가 남아 출산, 태어난 지 3일 후에 사망.
1920년(31세) 밀드레드와의 불화로 여론의 공격을 받음.
11월 이혼,위자료 10만 달러.
1922년(33세) 독일의 여배우 폴라 네그리와의 연애 사건.
1924년(35세) 16세의 여배우 리타 그레이와 결혼.
1926년(37세) 25년에 장남,26년에 차남 탄생. 리타그레이와 별거.
1927년(38세) 리타와의 이혼 문제로 또다시 여론의 비난을 받음.
8월 이혼.
1933년(44세) 폴레트 고다드와 항해 도중에 배에서 비밀리에 결혼.
1942년(53세) 폴레트와 이혼.
1943년(54세) 신인 여배우 존 밸리와 스캔들. 그녀가 낳은 사생아가
그의 자식인지 가리는 재판을 한 결과, 아니라는 판결을 받 음.
그는 아우슈비츠를 알고 있었을까?
1937년(48세) 프랑스 토비스 영화사(독일계 영화사)에서 '모던 타임즈'가
르네 글레르의 작품 '자유를 우리에게'를 표절한 것이라고 하여 고소
했으나 글레르의 성명서에 의해서 채플린의 승소로 끝난다.
1939년(50세) '독재자'의 촬영준비 중 독일의 미국 주재 정보기관의 방해
를 받는다.
1940년(51세) '독재자'를 완성, 공개.수개국에서 상영 금지.
1942년(53세) 독일에 대항하는 제2전선 결성 운동을 전개.
1945년(56세) 독일 패배. 히틀러 자살.
나의 사랑, 우나
1943년(54세)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18세)과 결혼.
1944년(55세) 큰딸 제달린 출생.
1946년(57세) 큰아들 미카엘 출생.
1948년(59세) 둘째딸 조세핀 출생.
1951년(62세) 세째딸 빅토리아 출생.
메카시 선풍이 헐리우드를 휩쓸었다
1947년(58세) '무슈 베르두'상영. 미국 여러 주에서 상영금지. 비미국
행위 조사 위원회(C.U.A)에 의해 몇 번에 걸쳐 출두 명령을 받
았으나 불응.
하원의원 존 랑킨은 채플린을 미국에서 추방하고 그의 영화를
금지하도록 국회에서 요구한다.
마침내 채플린은 미국을 버렸다
1952년(63세) '라임 라이트(각광)' 완성.런던에서 시사회.가족과 함께
영국 여행. 이 기회를 틈타 미국 법무성은 그의 귀국을 허가하
지 않는다고 발표
1953년(64세) 미국의 자산을 정리.스위스 로잔느의 미국 영사관에 가서
재입국 허가증을 반환.
1954년(65세) 우나 부인도 미국 시민권 포기, 대사관에 통고.
1957년(68세) '뉴욕의 임금님' 완성. 미국에서는 공개되지 못함.
걸작은 불행이 만드는 것인가
1953년(64세) 채플린의 일가, 스위스 로잔느 근교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둥지를 틀다.
1957년(68세) 네째딸 존 출생.
1960년(71세) 다섯째딸 아테트 출생.
1962년(73세) 막내아들 크리스토퍼 출생
1964년(75세) '자서전'간행.
1967년(78세) '홍콩 백작부인'상영.
천국으로 떠날 때의 선물은 오스카상!
1971년(82세) 프랑스에서 '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10편의 작품이 공개되다.
1972년(83세) 4월,20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옴. 아카테미 특별
상을 수상.9월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채플린 영화 73편이 상영
되고 시사회장에 초대됨.
1977년(88세) 12월 25일,스위스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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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작품]*
개같은 생활(63) (A DOG'S LIFE 3권)
1918년 퍼스트 내셔널 영화사
각본 감독 : 찰리 채플린
촬영 : 롤리 토더로
출연 : 찰스 채플린(떠돌이), 에드나 파이언스(에드나),
시드니 채플린(핫도그 장사), 빌리 화이트(카바레 주인)
'개의 생활에는 비참한 생활'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이 영화에서 찰리가 들개 스크라프를 버리지 않고 보살피는 까닭은 그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노천에서 잠을 자는 떠돌이 생활은 채플린 자신의 체험에서 온 것이기도 하며 당시 사회모습의 반영이기도 하다.찰리 채플린은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된 부분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공산주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비판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등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을 다룬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1930년대에는 찰리 채플린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찰리 채플린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다루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와의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찰리 채플린은 미국 시민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이 직접적으로 공산주의를 실천하거나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했는지 여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된 이야기는 시대적 맥락과 다른 해석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찰리 채플린이 정확히 공산주의자였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찰리채플린은 모던타임즈에서 기계화/자동화로 인한 실업문제라는 사회 현실을 적극적으로 풍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를 나치로 인한 제 2차세계대전의 징조, 소련의 대두 등의 외부적 문제와 결부되어 공산주의자 라는 오명을 쓰게 되는 발판이 됩니다.
이후 채플린은 자신과 히틀러의 외모가 비슷하다는것을 이용해 아데노이드 힝켈 이라는 독재자와 유대인이발사라는 1인 2역으로 나치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를 선보이는데 영화의 마지막 연설 장면으로 인해 당시 2차 세계대전에 관여하지 않으려한 미국 정부로부터 찍히게 됩니다.
위대한 독재자 개봉 직후 미국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연합군을 위한 원조를 부탁하는 연설회에서 채플린이 경이 후두염에 걸린 소련 대사 대신 연설을 하여 동무 여러분 ! 이라는 말과 함께 소련을 도와주자는 발언을 해 국민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자로 인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