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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규장각은 어떻게 되었나요?

규장각이 조선 말, 정조에 의해 세워졌지만,

그 후 세도가들의 정치도구로 변질되었다고 하고,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면서, 규장각을 폐지하려고 했다는데,

구한말에는 규장각은 그대로 지속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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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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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규장각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궁내부에 소속되다가 1895년(을미개혁)에 규장원으로 개칭, 1897년(대한제국)에 다시 규장각으로 개칭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규장각에서 소장하던 도서들은 조선총독부 참사관실 등에서 조사하고 정리하여 보관하였다가 일부는 이왕가로, 나머지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됩니다. 서울대학교는 이 도서를 바탕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을 설치했으며, 이에 따라 서울대 규장각이 확장 개편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규장각에서 소장했던 도서들을 일부 보관합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 왕실의 학문 연구 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정조에 의해 1776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초계 문신, 왕실 비서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환관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케 하여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疾苦) 등을 살피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규장각에서 양성된 학자들은 정조대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차츰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습니다. 갑오개혁 때 궁내부에 두었다가 이듬해 규장원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습니다. 1910년 이름이 없어지고 도서는 이왕직에 도서실을 도서실을 두어 보관하다 총독부 취조국으로 넘어갔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 사후 조선이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들이 출세하는 중앙 통로가 되어버려 갑신정변때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궁내부에 소속되다 1895년 규장원으로 개칭, 1897년 다시 규장각으로 개칭되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인문·예술 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정조 사후 명맥은 유지가 되었으나, 사실상 권한은 많이 축소되었고( 이 규장각을 통해 세도 가문의 권신들이 출세하는 통로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하죠. ) 1910년까지 존속하다가 경술조약으로 인해 없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