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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11.07

무령왕릉은 어떤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나요?

무령왕릉이 백제의 역사나 문화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령왕릉과 함께 있는 왕릉원의 고분은 어떤 사람들이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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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분으로,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며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입니다.

    무령왕릉 말고도 무왕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 되는 쌍릉도 있는데 쌍릉은 주인이 확실시되었지만 역시 백제 멸망 후 천수백년간 이미 여러번 도굴되어 주인을 확실시할 지석이 남아있지 않아 심증은 충분하나 물증이 없는 상태 입니다.

    무령왕릉이 도굴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예술품이나 국제무역수준은 영원히 알수 없었을 것이며 백제의 장신구를 비롯해 무덤의 주인과 건설 경위가 담긴 묘비석이 발견된 점은 가장 중요한 성과입니다.

    이 석판을 통해 무덤이 무령왕과 왕비의 것이라는 점,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동안 가매장한 후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백제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을 알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의 무령왕릉의 발굴은 몇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백제의 왕릉은 대부분이 도굴된 상태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무령 왕릉을 통래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고대 시기의 고분은 대부분 왕릉의 주인공과 조성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무령 왕릉은 묘지석을 통해 사서와 비교하여 정확히 주인공과 사망시기, 축조 시기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묘지석의 기록에 따르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인 계묘년 병술일이 초하루인 5월 7일 임진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계유일이 초하루인 8월12일 갑신일에 등관에 있는 대묘에 안장하였다.' 기록되어 있습니다.